[주말기획] 감독의 믿음이 세터를 춤추게 한다

입력 2014-12-19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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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배구를 세터놀음이라고 한다. 야구의 포수, 축구의 골키퍼 같은 특수포지션이다. 세터는 감독 및 동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코트를 진두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이다. 세터의 운영에 따라 배구판의 희비가 엇갈린다. 삼성화재의 주전세터 유광우(오른쪽 두 번째)가 센터 이선규(맨 왼쪽)에게 공을 넘겨주고 있다. 스포츠동아DB

■ 세터는 무엇으로 사는가?… 세터 놀음엔 세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 세터는 신뢰가 만든다
신인 세터 안 뽑은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의 믿음
자신감 없던 조송화 ‘세트 1위’ 선수로 성장시켜

2. 세터는 경쟁을 통해 강해진다
현대건설, 노련한 염혜선-수비좋은 이다영 경쟁
대한항공 강민웅은 토종, 황승빈은 용병과 궁합

배구의 세터는 야구의 포수, 축구의 골키퍼와 함께 특수 포지션으로 불린다. 한 번 주전이 되면 쉽게 자리를 넘겨주지 않는다. 코트에서는 감독을 대신해 동료들을 리드하는 현장 사령관이다. 그래서 ‘배구는 세터 놀음’이다. 감독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터와의 기(氣)싸움이다. 감독과 세터는 승리라는 공통 목표가 있지만 실행 방법은 다를 수 있다. 부자지간이라도 감독과 세터는 가끔 다른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결과가 좋으면 서로 만족하지만 결과가 나쁠 경우 여러 가지 불편한 일이 생긴다.

NH농협 2014∼2015 V리그에서 활동하는 세터들은 감독, 동료들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어느 팀은 서로를 믿어 성공했고 어느 팀은 경쟁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냈다. 세터는 공을 올려서 공격수의 득점을 돕지만 이 과정에서 주도권을 놓고 소위 갑을관계도 형성된다. V리그 코트를 보면 세상살이가 보인다.


● 흥국생명 조송화와 박미희 감독의 신뢰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2014∼2015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팀이 꼴찌를 차지해 제1순위 지명권을 가졌는데 운도 좋게 좋은 신인이 많이 나왔다. 선택은 ‘공격수 이재영 혹은 세터 이다영’ 가운데 한 명이었다. 진주 선명여고 졸업반 쌍둥이를 놓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호사가들의 관심이 컸다.

김사니가 2012∼2013시즌을 마치고 FA선수 자격으로 아제르바이잔행을 결정하자 흥국생명의 주전세터는 조송화 몫이 됐다. 부족한 점이 드러났다. 외국인선수 바실레바는 세터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토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드러내놓고 신경질을 부렸다. 마음이 여린 조송화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전임 류화석 감독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격려도 했지만 말보다는 몸이 기억하고 움직여야 성공하는 것이 스포츠다.

‘세터를 잘 뽑으면 팀의 10년이 편해진다’는 배구 속설대로라면 세터를 잡아야 했다. 다음 순번이 확실한 현대건설도 생각해야 했다. 주전 염혜선을 붙잡아둔 현대건설은 레프트 자리가 비는 팀이었다. 국가대표 이재영이 간다면 퍼즐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상대팀보다는 우리 팀을 먼저 생각했다.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 보자면 레프트가 꼭 필요했다. 신연경이 부상으로 시즌 출전이 어려워 공백을 메울 선수가 필요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박 감독은 “우리 세터 조송화를 믿는다”고 했다.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감독은 드래프트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조송화를 불렀다. 왜 자신을 부르는지 조송화도 알았다. 감독은 수백마디 말보다는 선택으로 신뢰를 줬다. “너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한마디만 했다. 진심이 조송화의 마음을 움직였다.

박 감독은 또 다른 카드도 꺼냈다. 외국인선수 루크가 처음 팀 훈련에 참가한 날 조송화와 함께 불렀다. 감독은 루크에게 말했다. “나는 팀의 세터를 존중해주는 선수를 원한다. 루크가 송화보다 나이 많은 언니다. 동생처럼 잘 대해주고 보살펴라”라고 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감독은 루크에게 팀의 첫 번째 원칙을 알린 것이었다. 시즌에 들어서자 루크는 조송화가 올린 어떤 토스도 군말 없이 때렸다. 간혹 실수가 나오면 토스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손을 들고 “내가 잘못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전까지 위기만 오면 벤치를 먼저 바라보던 조송화는 신뢰 속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주위의 격려가 잠재된 능력치를 끌어냈다. 18일 현재 세트 부문 1위다. 세트 평균 10.019개다. 유일한 두 자릿수 세트다. 지난 시즌 조송화의 세트는 9.421개였다. 세터는 신뢰가 만든다.

배구에서 세터는 코트 위의 사령관이다. OK저축은행이 이번 시즌 돌풍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장신센터 이민규(오른쪽)의 부활이 시급하다. 스포츠동아DB



3. 좋은 공격수는 ‘세터 복’이 있어야 한다
지난 시즌 돌풍 주도했던 OK저축銀 이민규
특급 공격수 시몬 중심 토스 부담에 슬럼프
부상 경험 대한항공 산체스,나쁜 토스 예민

4. 세터와 감독 토스 궁합 맞으면 승리한다
삼성화재 유광우 안정된 볼 배급 최고 정평
신치용감독 “80% 생각 같을 때 지지 않는다”


● 현대건설 염혜선-이다영, 대한항공 강민웅-황승빈, 현대캐피탈 권영민-이승원의 경쟁

요즘 현대건설 이다영은 매일 오전 6시면 훈련장에 혼자 나와 토스연습을 한다. 국가대표 출신의 세터는 지금 팀의 주전이 아니다. 선배 염혜선이 버티고 있다. 쌍둥이 언니 이재영이 데뷔하자마자 주전자리를 꿰차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과 비교하면 출발은 미약하다. 팀의 주전으로만 배구를 해왔기에 지금 경험은 생소하다. 좌절 속에서 열여덟 살의 선수는 다부지게 선배와 경쟁을 시작했다. 그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새벽 훈련이다.

시즌 전 국영준 사무국장은 FA선수 염혜선의 고향 목포로 향했다. 팀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설득했다. 염혜선은 잔류를 택했다. 당시 배구계는 “현대건설 구단이 1순위 지명권을 가질 경우 이다영을 찍지 않겠다고 약속해줬다”는소문이 나돌았다.

양철호 감독은 최근 소문의 진위를 묻자 “감독으로서는 해줄 수 없는 약속이다. 선수라면 누구나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자리는 누구에게도 보장해줄 수 없다”고 했다. 감독은 두 선수의 경쟁을 통한 전력의 극대화를 노린다. 염혜선은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세트플레이와 동료를 이용한 플레이에 능하다. 이다영은 높은 점프로 블로킹과 수비를 잘한다.

감독은 두 세터에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라”고 충고했다. 염혜선은 “처음 내 자리에 다영이가 들어갈 때 기분이 묘했지만 이제는 받아들인다. 경쟁자라기보다는 서로를 도와서 각자 팀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시즌 한선수의 예상치 못한 군 입대 이후 5명의 세터를 테스트했던 대한항공은 이번 시즌 2명으로 주전 세터를 줄였다. 강민웅과 황승빈이 번갈아가며 공을 올린다. 강민웅은 토종 선수들과 호흡이 좋다. 루키 황승빈은 주포 산체스가 좋아한다. 공격수치도 훨씬 좋게 나온다. 김종민 감독은 2명 세터의 장단점을 적절히 조합해 출전시기를 결정한다. 황승빈이 선발, 강민웅이 중간에 들어가야 팀 전력이 가장 좋아진다고 판단했다. 현대캐피탈도 베테랑 권영민과 신인 이승원이 번갈아 출전한다. 김호철 감독은 이승원의 출전시간을 차츰 늘리고 있다. 빠르고 용감한 토스를 김 감독은 좋아한다.

세터는 경쟁을 통해 배짱을 키우고 마음을 단련한다.


● OK저축은행 이민규의 슬럼프-공급자 중심 혹은 소비자 중심

지난 시즌 V리그에 돌풍을 일으킨 OK저축 은행을 보면서 많은 배구인은 이민규를 탐냈다. 모든 남자부 감독들은 “자유계약제도가 되면 가장 먼저 데려가고 싶은 선수”로 꼽았다. 한국배구가 항상 원했던 장신(191cm)의 세터. 토스가 빨랐다. 어떤 상황에서건 빠르고 정확한 공을 쏘아주는 능력은 신생팀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김세진 감독도 그의 능력을 알기에 2시즌 연속해서 팀의 키플레이어로 꼽았다. 그런 이민규가 이번 시즌 흔들렸다. 곽명우가 대신 투입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세터의 능력을 보여주는 수치도 떨어졌다. 지난 시즌 세트 평균 11.825개였지만 이번 시즌은 10.667개다. 7개 구단 세터 가운데 3위다. 1위는 삼성화재 유광우의 11.328개다.

부진한 이유도 있었다. 국가대표로 선발돼 3개월 이상 팀을 비웠다. 대표팀에서는 한선수가 주전이었다. 경기에 투입된 시간이 적었다. 경기감각이 떨어진 상태에서 동료들과 손발을 맞춰볼 시간이 부족한 결과가 최근 드러난 수치다.

김세진 감독은 지금 이민규의 부진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을 내렸다. “능력은 지난 시즌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머리, 지금 이민규의 생각이다. 그동안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서 공격수에게 주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이번 시즌은 공격수 중심으로 해아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거기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세터로 배구를 시작해 공격수로 성공했던 김감독의 해석은 세터와 공격수를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흔히 공격수는 세터가 만든다고 한다. 반대로 좋은 공격수는 평범한 세터도 좋게 보이게 만든다. 이들의 관계는 야구의 배터리와 같다.

함께 마음을 맞춰야 좋은 결과가 나오지만 주도권을 누가 가지느냐는 선수와 감독의 배구관에 따라 다르다. 현재 OK저축은행에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있다. 지난 시즌에는 이민규가 흔들리던 바로티를 위해 뭔가를 해줘야 했지만 시몬은 바로티와 급이 다르다. 센터출신 시몬의 입맛에 맞게 빠른 공을 올려야한다는 부담감이 지금 이민규를 힘들게 한다.

대한항공 산체스가 지난 시즌에 비해 토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5명의 세터가 올려주는 공을 때려야 했던 지난 시즌과 비교한다면 이번 시즌 더욱 편할 것 같지만 불만표출이 많아졌다. 김종민 감독은 산체스가 왜 그렇게 토스에 민감한지 속사정을 들려줬다. “예전에 세터가 엉망인 팀에 있었는데 나쁜공을 때리다 허리를 다친 적이 있다. 산체스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민감하다”고 털어놓았다. 김 감독은 산체스에게 “그래도 불만을 드러내지 말고 세터에게 잘 해주라”고 당부했다. 좋은 공격수는 세터 복이 있어야 한다.


● 삼성화재 유광우의 분배와 신치용의 80% 필승론


남자부 감독들에게 “공격수가 가장 때리기 편한 공을 올려주는 세터”를 물어보면 대부분 삼성화재 유광우를 꼽는다. 세트 부문 1위 선수답게 유광우는 어떤 위치, 상황에서건 가장 안정적으로 공을 올려준다. 삼성화재의 배구를 외국인선수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몰빵배구’라고 혹평도 하지만 몰빵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공격수가 한 경기에서 100번 이상의 점프를 해낼 체력이 받쳐줘야 하고 공격수가 제대로 공을 때리게끔 위치와 타이밍이 좋게 공을 꾸준하게 잘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신치용 감독은 “유광우에게 가장 빛나는 능력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세터가 결정적 상황에서 존재가치를 보여주는 화려한 토스를 하면 빛은 나겠지만 경기 도중 그런 순간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보다는 평범하게 보이도록 토스를 꾸준하게 안정적으로 잘 해주는 것이 세터에게는 더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신 감독은 그래서 세터의 결정권을 최대한 보장한다. 공격수들에게는 “토스에 절대로 불만을 표시하지 마라. 그런 선수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터가 선배들 눈치를 보고 공을 올려주면 그 팀은 끝”이라고 감독은 믿는다. 현역시절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시다.

감독으로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도 여기다. 과연 감독은 중요한 순간 세터에게 구체적인 공격을 지시해야할까.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은 “선수마다 다르다. 어느 선수는 내가 A라고 자시하면 B를 해버렸다. 공이 예상대로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B를 했다고 나무랄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선수에게는 A, B, C 3개의 경우가 있는데 C는 확률이 떨어져 보인다. 나머지는 알아서 판단하라며 A, B를 던져준다”고 했다. 반대도 있다. 한국전력의 권준형은 현대캐피탈과 풀세트 접전을 벌이던 5세트 14-13의 상황에서 신영철 감독에게 “어디로 가요?”라며 답을 구했다. 선택은 쥬리치였고 성공했다.

신치용 감독은 “80% 정도 선수와 감독의 토스 선택이 맞는 날은 지지 않는다. 대신 50% 정도에 머물면 고전한다”고 했다. 그래서 감독에게 배구는 분배의 경기다.


■ 알아두면 좋은 배구 용어

● 볼 끝=
세터가 토스한 공의 구위. 공격수에게 공이 힘 있게 가야하고 정점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더 지나가야 볼 끝이 산다고 표현한다. 이 경우 직선 크로스 공격이 모두 가능.

● 볼 꼬리=공격수가 때린 공의 구위. 공에 위력이 없으면 볼 꼬리가 보인다고 말한다.

● 매달려서 치기=공격수가 점프의 정점에서 공을 때리지 못하고 내려오면서 치는 것.

● 타점잡고 치기=매달려서 친다의 반대 표현. 공의 정점에서 때리는 것. 감독들이 올라가면서 때리라고 하는 이유다.

● 짊어지고 치기=공을 때리는 포인트가 몸 중심의 뒤에 치우치는 것. 이 경우 코트에 내리꽂기가 힘들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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