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2019년에 다시 떠올린 1995년의 니포축구

입력 2019-05-08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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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1998년까지 부천 유공을 이끌었던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제자들이 최근 각 팀의 수장을 맡으면서 K리그에 ‘니폼니시 축구’가 회자되고 있다. 선수와 코치로 니폼니시 축구를 경험한 최윤겸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과 김기동 포항 스틸러스 감독, 이임생 수원 삼성 감독, 남기일 성남FC 감독(왼쪽부터).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아무리 사소해도 가벼이 여겨선 안되는 게 인간관계다.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 낸다”고 한 피천득 선생의 말씀은 정곡을 찌른다.

축구기자를 하면서 첫 번째 담당한 외국인 감독은 러시아 출신 발레리 니폼니시(76)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카메룬을 이끌고 8강에 올라 명성을 얻은 그가 부천 유공(현 제주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은 건 1995년이다. 그해 1월 스페인 우엘바 전지훈련을 동행취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돌이켜보면 기자의 궁금증을 어찌나 상세하게 설명해주던지, 지금도 그 친절함을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난다. 구체적인 내용은 희미하지만 아무튼 현대 축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다.

니폼니시는 4년간 팀을 맡으면서 148경기 57승38무53패를 기록했다. 리그 우승은 없었다. 1997년엔 리그 최하위까지 떨어졌다. 그런데도 니포축구는 존경받았다. 유공 선수단은 물론이고 K리그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윤정환 감독(태국 무앙통)은 수년 전 니폼니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선수들을 존중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분이다. 선수 때는 그의 철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축구를 즐긴다는 걸 이제야 느낀다.” 경쟁을 넘어 즐기는 축구를 알게 해준 지도자가 니폼니시다.

니포축구의 근간은 패스다. 윤정환을 중심으로 김기동, 윤정춘 등이 펼치는 물결 같은 패스의 파노라마는 압권이었다. 특히 상대지역에서 빠른 패스를 통해 공간을 만들고, 틈이 보이면 거센 파도가 되어 골문을 향했던 장면은 그림 같았다. 그동안 국내에선 보지 못한 전술이었다. 당시 수원 삼성 김호 감독은 “니포축구는 상대팀도 재미있게 만든다”고 칭찬했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니폼니시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2017년 부천FC1995의 초청으로 방한한 그의 얼굴엔 주름의 깊이가 더해진 건 사실이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였다. 그는 “관중석에 있는 팬들과 함께 하는 축구를 하라. 11명의 좋은 선수가 아무리 이기는 축구를 한들 관중석이 텅 비어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며 팬을 위한 축구를 역설했다.

니폼니시는 K리그를 떠났지만 그와의 인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제자들 덕분이다. 특히 최근 최윤겸 제주 감독과 김기동 포항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여기저기서 그를 불러낸 글들이 쏟아졌다.

최 감독은 니폼니시 사단에서 수비 코치를 했다. 구단은 “제주축구의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김 감독은 니포축구의 핵심 역할을 한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그는 자신의 롤 모델로 니폼니시를 꼽으면서 “선수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라고 설명했다.

이들 이외에도 수원 이임생 감독, 성남 남기일 감독과 최근 제주 지휘봉을 내려놓은 조성환 감독, 이을용 제주 수석코치, 윤정환 감독 등이 지도력을 인정받는 제자들이다. 니폼니시는 2년 전 “나와 함께 했던 선수 중 15명이 감독, 코치를 하고 있다. 그들이 나와 함께 했던 축구를 자양분 삼아 자신의 축구를 잘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여유로움과 평정심, 그리고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환한 미소까지 빼닮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적어도 즐겁고 창의적인 니포축구를 계승하려는 지도자가 줄줄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현길 전문기자·체육학 박사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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