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격히 퇴보한 북한 사격 왜?
한국 사격 인천AG서 금8·은11·동8 맹활약
北 리호준 1972뮌헨 金 등1970년대 전성기
비용부담에 큰 소총 몰락…권총 종목만 지원
“날치기(클레이), 중심권총(센터파이어 권총), 보총(소총), ….” 남북의 사격은 똑같은 종목을 두고도 서로 다른 용어를 쓴다. 그러나 2014인천아시안게임에서 입상을 위한 굳은 의지만큼은 똑같았다. 한국사격은 이번 대회에서 금8·은11·동8 등 총 27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당초 금 5∼7개의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며 한국선수단이 종합 2위를 달리는 데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반면 2010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금3·은4·동5 등으로 12개의 메달을 획득했던 북한사격은 부진했다. 러닝타깃과 클레이 종목에만 출전해 금1·은3·동1 등 5개의 메달에 그쳤다. 북한은 1970년대 한때 국제무대에서 한국사격을 앞서기도 했지만, 이미 추월당한지 오래다.
● 1972년 북한사격 올림픽 금메달이 한국에 자극제
남북의 사격은 이미 1970년대부터 경쟁구도를 형성하며 발전했다. 사격은 북한이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딴 종목이다. 리호준이 1972뮌헨올림픽 남자 50m 소총 소구경 복사에서 세계기록을 세우며 정상에 올랐다. 당시는 아직 한국이 올림픽에서 첫 금(1976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양정모)을 획득하기 전이었다. “원수의 심장을 겨누는 심장으로 쐈다”는 리호준의 수상 소감은 한국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남북의 군사적 대치 상황 속에서 사격이란 종목은 큰 상징성이 있었다. 사격대표팀 윤덕하 감독은 “그때부터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사격을 육성했다. 상무의 모태가 된 ‘육군 사격지도대’를 ‘육군 사격지도단’으로 확대·강화했고, 1978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서울에 유치했다”고 떠올렸다. 이후 북한사격에선 1982뉴델리아시안게임 7관왕 서길산(60), 한국사격에선 아시안게임 4회 연속(1974·1978·1982·1986년) 메달리스트 박종길(68·전 태릉선수촌장) 등이 버팀목 역할을 했다.
● 명맥 끊긴 北 올림픽 금…비용 부담 큰 소총의 몰락
한국은 1988서울대회 차영철(은·kt감독), 1992바르셀로나대회 이은철(대한사격연맹 이사)과 여갑순(이상 금), 2000시드니대회 강초현(은·한화갤러리아) 등 꾸준히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2000년대 들어와선 올림픽에서만 5개의 메달(금3·은2)을 수확한 ‘권총황제’ 진종오(kt)가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북한사격의 올림픽 금맥은 1972뮌헨대회 이후 끊어졌다. 윤덕하 감독은 “북한은 1970년대 소총 종목이 강세였다. 하지만 소총은 장비가 많이 들어가 비용 부담이 크다. 풀세트를 맞추면 1500만원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입장에선 돈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북한사격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드는) 권총 종목 위주”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북한은 권총 종목에선 2004아테네올림픽에서 김정수가 동메달을 획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대회 권총 종목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북한권총대표팀이 인천아시안게임 직전 열린 스페인 그라나다 세계선수권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인천|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setupma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