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스포츠동아DB
노찬엽. 사진제공|LG 트윈스
● ML도, 일본에도 없는 ‘7사’차 타격왕 탄생
1990시즌 막바지 LG 노찬엽, 빙그레 이강돈, 해태 한대화는 타율 1리차로 피 말리는 타격왕 경쟁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경기를 끝낸 건 노찬엽. 그는 당시 라이벌 팀의 타격왕 배출을 경계했던 OB의 고의4구 작전(2개)으로 인해 결국 시즌 타율을 0.333으로 마무리했다. 그 사이 2위 이강돈과 3위 한대화가 힘을 냈다. 이강돈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를 기록해 0.33486의 타율로 노찬엽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최종승자는 잔여경기가 가장 많이 남아있던 한대화였다. 한대화는 10월 1~2일 인천 태평양전에서 5타수4안타로 맹타를 휘두르며 타율 0.33493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일본리그에도 없는 소수점 아래 다섯 자리까지 비교한 타격왕은 그렇게 탄생했다.
해태 시절 한대화. 사진제공|한국야구위원회
● “내 생애 첫 타격왕…기습번트까지 대려고 했다”
한 감독관은 “사실 처음엔 타격 동률인 줄 알았지 ‘사’까지 비교해서 타격왕을 할 줄 몰랐다”며 껄껄 웃었다. 한 감독관에 따르면, 당시 10월 1일 국군의 날부터 3일 개천절, 추석까지 겹쳐 이례적으로 긴 명절연휴였다고 한다. 야구장에는 역대 가장 치열한 타격전쟁을 지켜보는 팬들로 북적였다. 치열한 승부에, 많은 관심까지 부담감이 클 만도 한데 한 감독관은 리그를 대표했던 해결사답게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한 감독관은 “그때 타격컨디션이 워낙 좋아서 긴장하지 않았다”며 “마지막 경기에서 2안타만 치면 공동 타격왕 타이틀을 딴다고 해서 경기 전에 ‘기습번트를 대볼까’도 고민했는데 막상 타석에 들어서니까 못 하겠더라.(웃음) 마지막 안타가 태평양 2루수 정영기의 글러브 끝에 맞고 떨어지면서 안타가 됐다. 참 힘들게 타격왕이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빙그레 시절 이강돈.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강돈이가 더 떨렸겠지…전화했다더라고”
피 말리는 타격왕 경쟁에 한 감독관만큼 떨렸던 이는 아마 이강돈 현 북일고 감독이었을 터. 한 감독관은 “이강돈이 시즌을 먼저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나보다 더 떨리지 않았겠느냐. 그때는 지금처럼 TV중계가 없었다. 얼마나 결과가 궁금했는지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내 성적이 어떻게 됐는지 자기가 아는 (해태) 사람들한테 전화가 왔다고 하더라. 그만큼 치열했다”고 회상했다.
역대급 승부였기 때문일까. 한 감독관에게 타격왕을 수많은 타이틀 중에 가장 값진 기록으로 꼽았다. 한 감독관은 “타격왕뿐 아니라 15경기부터인가 최다안타 타이틀도 걸려있었다”며 “그때는 타이틀이 걸려있으면 경기수를 조절하면서 흔히 말하는 ‘타율 관리’를 하는 선수들도 있었는데 난 최다안타 때문에 계속 경기에 나가야했다. 어렵게 달성한 타격왕이었고, 타율관리 없이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이겼기 때문에 기분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계속 타율 3할은 치고 있었지만 워낙 ‘찬스에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다보니까 정교함이 부각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처음으로 타격왕을 차지하게 돼 상당히 기뻤다. 지금도 그날의 감격은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