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기자가간다]야구협심판강습회를가다

입력 2009-03-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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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송하더라도우렁차게 “보크”
영화 ‘더 팬(The Fan).’ 바비 레이번(웨슬리 스나입스)이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비에 젖은 홈 플레이트를 향해 슬라이딩하는 순간. 랜디 존슨(46)에게 2루타를 친 구대성(40·한화)이 후속타자의 보내기 번트 때 3루를 돌아 홈 플레이트로 돌진하는 순간. 수만 관중은 잠시 숨을 멈추고, 그들의 손동작을 예의주시한다. ‘아웃, 세이프!’ 찰나의 액션과 비명. 그리고 그들은 순간의 판단만을 남긴 채, 다시 함성 뒤에 숨는다. 주연이 아니기에 돋보여서는 안 되고, 잘해도 박수받기 힘들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에도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 억울한 직업의 애환을 엿보기로 했다. 2월27일. 서울 덕수고등학교에서 열린 대한야구협회의 심판강습회를 찾았다. ○이론수업, 졸음은 쏟아지고 “기자가 심판체험이라니. 한국야구 104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네요.” 대한야구협회 윤정현 홍보이사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심판강습회에는 70여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전국16개시도 지부의 심판들. 고교야구에서는 지역예선을 통과해야 진학 문제가 걸린 전국대회에 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은 막중하다. 간간이 순수 아마추어 야구 마니아들도 눈에 띄었다. 오전수업의 시작은 이론 강의. 1교시는 ‘주자&타자 편’이다. 강사는 김형주 심판. “제가 3만 관중 앞에서도 안 떨리는 사람인데, 70여명 앞에서는 떨리네요.” 심판강습회의 교관들은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 “하나라도 더 배워가야죠.” 다른 참가자들은 공책을 꺼내들고 메모하기 바쁜데, 스르르 눈이 감겨 온다. “졸면 푸시 업(Push-up) 시킵니다.” 호통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재미있는 사례가 들린다. ○오심에서 배운다 2008년 경성대와 원광대의 경기. 1사 2,3루에서 경성대의 공격. 투수 땅볼이 나오자 3루주자가 런다운에 걸렸다.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던 주자. 결국 3루를 지나쳐 좌익선상까지 향하고 말았다. 보통 주자 2명이 한개 베이스에 겹치면 선행주자에게 우선권이 있다. 후속 주자는 아웃. 3루심은 후속주자를 아웃시키고, 3루주자에게도 주루포기 의사가 있다고 판단, 아웃을 선언했다. 순식간에 공수교대. 경성대로서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열띤 토의가 이어졌다. 만일, 오버런 한 3루주자가 주루의사가 있어 3루로 돌아왔다면 후속주자의 아웃. 주루의사가 없다면 3루의 점유권은 후속주자의 것이 된다. 어느 경우든 한 명의 주자는 3루에서 숨을 쉬고 있어야 한다. 참가자들은 오심 사례를 공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집단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속임수는 엄단하라 배명고와 광주일고의 2008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전, 1-1로 맞선 연장13회. 배명고는 2사 1루에서 우중간을 꿰뚫는 안타를 만들어내며 경기를 마무리 지을 기회를 맞았다. 광주일고 중견수가 공을 잡는 순간, 이미 배명고의 주자는 3루를 돌고 있었다. 이 때 광주일고 중견수가 꾀를 냈다. 잡은 공을 펜스에 걸린 현수막 사이에 끼운 것이었다. 1루주자는 3루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19회 접전 끝에 배명고가 승리했으니 다행이었지, 심판이 잡아내지 못한 속임수 때문에 승부가 뒤바뀔 뻔한 사건이었다. 교관들은 “심판의 집중력”을 강조했다. 2교시 ‘투수 편’ 보크 규정에 대한 강의에서도 속임수 차단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보크에 대한 규정이 어렵다고 하지만 판단기준은 간단하다. 김창균 교관은 “타자나 주자를 속일 의향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했다. 그래서 퀵피치(Quick-Pitch)는 반칙. 투수가 세트포지션에서 정지 동작을 취한 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투구의사를 갖춘 것으로 간주한다. 정지 동작에서 몸을 움직였는데도 공을 던지지 않았다면, 결국 투구의사를 보이고도 투구하지 않은 것이 된다. 타자를 현혹시켰기 때문에 보크다. 3교시 강사인 심태석 심판은 “특히, 학생야구에서는 정직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엄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피처 뻑, 유, 원 베이스!” 오후에는 실외로 나갔다. 동작과 콜(Call)교육이 이어졌다. 정확한 동작과 우렁찬 콜은 심판위엄의 상징. 한 교관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감 있게 콜을 하면, 함부로 항의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교관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콜을 자랑한다는 오광수 심판. 그는 “콜 연습하면서 목소리 쉰 게 아까워서 심판을 그만둘 수 없다”며 웃었다. ‘아웃, 세이프, 파울, 라인아웃.’ 점점 쇳소리가 난다. 그나마 페어동작에서는 콜이 없는 것이 다행. 여기까지는 본 것들이 있어 따라했는데, 보크부터는 낯설다. “피처 뻑(balk), (주자를 가리키며) 유(You), 원 베이스!” 보크 콜을 해야 진짜 심판이 된다. 부정한 행위를 ‘콱’ 꼬집어 낸다는 기분. 겉으로는 우렁차게, 하지만 속으로는 ‘어딜 감히 속여? 넌 딱 걸렸어’라고 속삭였다. ○내 위치가 어디지? 갈팡질팡 포메이션 이어지는 포메이션 수업. 야수들이 각자의 커버플레이 위치가 있듯 심판들도 상황에 따른 자기 위치가 있다. 김형주 심판은 “포메이션은 몸에 완전히 익어서 상황이 주어지면 무의식중에 발걸음이 떨어져야 한다”고 했다. 첫 번째 상황은 주자 없을 때 2루심. 외야플라이가 나오면 외야 쪽으로 따라 나가 포구 여부 등을 확인한다. 이 때 3루심은 2루를, 주심은 3루를 책임진다. 타자주자가 2루를 돌면 1루심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향해 혹시 나올지 모르는 홈 상황에 대비한다. 주자 1루, 주자 3루, 주자 1,2루 상황에서 각 심판들의 움직임도 다 다르다. “어느 한 명이 움직이면, 나머지 심판들이 시계반대방향으로 빈 베이스를 채우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어느 자리에 가도 갈팡질팡, 어리바리.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문다. 전북 전주에서 사회인야구팀 감독을 하고 있는 일반인 참가자 김문주씨는 “이제 어필은 자제 하겠다”며 웃었다. ○스타이전에 사람을 만들어야 1965년, 장훈이 소속돼 있던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는 한국을 방문해 국내선발팀과 연습경기를 치렀다. 도에이의 전설적인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는 심판판정에 항의하던 오오스기 가즈오의 뺨을 때리며 야구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르쳤고, 그 해 신인이던 오오스기는 결국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대선수가 됐다. 반면, 한국의 천재적인 축구선수는 그에 걸맞는 인성을 갖추지 못해 떠돌이 신세가 됐고, 또 심판에게 ‘주먹감자’를 날렸다. 강습회에 참가한 한 심판은 “야구에서도 학생 선수들이 격한 어필을 남발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 사회의 가치규범을 체득하는 것이 교육의 시작. 야구선수라면 그라운드 안의 규범을 익히는 것이 선수로서의 첫걸음이다. 심판은 야구규칙의 체현자. 그래서 대한야구협회 김희련 부회장은 “스타 이전에 인성을 갖춘 선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심판교육을 더 강화해 갈 것”이라고 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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