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당시 나라의 재정 뿐만 아니라 축구협회의 실정도 어려웠기 때문에 합숙이나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해외 원정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고를 빌려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때문에 월드컵 출전을 위한 선수단 단복을 맞추는 것은 선수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래서 당시 여유 돈이 없었던 선수들은 한 양복점에서 통사정 끝에 차후에 갚기로 하고 ‘외상 양복’을 맞췄는데 출국할 때까지 양복 값을 지불하지 못해 마치 빚쟁이 줄행랑 치듯 스위스 행 비행기에 오른 선수가 많았다.
하지만 원조 태극전사들의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렵게 단복을 구한 대표팀은 비행기표 역시 가까스로 구해 1954년 6월13일 출발, 방콕을 경유해 스위스에 입성했다. 6월15일 오후 10시에 도착한 선수들은 48시간이 넘은 장시간 비행 탓에 지쳐있었고 머리스타일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어렵게 입은 단복에 있었다.
당시 대표팀은 아시아국가 중 최초로 월드컵에 참가하는 팀이었기 때문에 외신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해외 보도진들은 한국대표팀을 취재하려고 공항에 몰려들었다. 그 중 한 예리한 기자가 대표팀의 단복을 관찰하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 양복팬츠가 왜 그리 짧은가. 그것이 유행인가?”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선수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모습이 어떤 행색인지 인식하게 되었다고.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양복감으로 만들어진 단복은 질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시간 비행 탓에 바지 통이 구겨지고 말아 올라가 있었다. 한 선수는 허벅지까지 바지가 올라가 있었을 정도로 ‘굴욕 패션’이 따로 없었다.
이때 한 선수가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이기 때문에 물자를 절약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로 여겨 모두 바지를 짧게 해서 입는다”고 재치 있게 답변했다는 후문.
대표팀은 스위스 월드컵에서 0-9, 0-7이란 처참한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월드컵 도전, 그리고 외상 양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질 수 있었던 당당한 정신을 해외에 널리 떨친 계기가 됐다.
46년이 흐른 2010년.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을 노리는 허정무호는 세련된 단복을 입고 있다.
대표팀 공식 수트 협찬사인 갤럭시 측은 “Pride 11 suit는 남아공의 기후를 고려, 최고급 울소재로 특별 제작했다. 특히 운동 선수 특유의 신체조건을 살린 기능적인 면을 많이 살렸다”고 설명했다.
노이슈티프트(오스트리아)=김진회 동아닷컴 기자 manu35@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