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이라는 단어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야구경기에도 종종 쓰인다. 팬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상황과 반전, 여기에 선수들의 프로답지 않은 플레이가 가미될 때 이를 비하하며 자조하는 뜻에서 일컫는 단어인데, 신기하게도 막장 경기는 매 시즌마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팬들을 울리고 웃긴다.
양팀 모두 치열하게 열정을 쏟아붓지만 정작 그 수준은 미흡한 ‘막장’ 경기. 그때마다 팬들의 속은 말이 아니다. ‘여기까지겠지, 설마 더 나가진 않겠지’ 기대하다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다가, 결국 누가 더 고품격 막장인지를 겨루는 듯한 양팀 선수들의 진지한 표정 앞에 혀를 끌끌 차며 체념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도 기억에 남는 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명승부보다 어딘지 어설프고 부족했던 경기들이니 말이다.
종종 팬들이 술자리에서 되짚어 보는 경기는 세기의 명승부가 아닌 세기의 막장 매치인 경우가 많고, 진지하게 ‘클래식 막장’의 순위를 헤아려 보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심지어 나는 몇몇 경기를 소장해서 재차 감상하곤 하는데 그 유명한 ‘5.22 대첩’이나 ‘엘꼴라시코 더비’ 등은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모니터에 물을 뿜을 정도다.
예측불가의 상황들이 연이어 벌어지던 어이없는 경기가, 대체 이 경기의 끝은 어디인가 싶어 한숨을 푹 쉬기까지 했던 그 게임들이 왜 그렇게 머릿속에 콕 박혀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마치 선남선녀의 그렇고 그런 러브스토리는 금세 잊혀지지만, 어이없어 낄낄거리며 웃었던 B급 영화들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듯 말이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예측한 방향으로 순하게 흘러가는 일들이 어디 그리 많던가. 때로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 앞에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돌아서야 하는 날들이 종종 온다.
우리 인생에 찬스마다 한방 쳐줄 수 있는 대타가 있는 것도, 위기마다 틀어막아 줄 철벽 마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비마다 어처구니없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허다하니 말이다. 하지만 틀어진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은 힘들어도, 야구는 내일의 그라운드에서 내일의 선수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막장 야구를 보며 뭔가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삼성과 SK의 한국시리즈. 2011 프로야구의 최강자인 두 팀답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경기를 선보이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쉽다. ‘막장’까지 가길 바라는 건 물론 아니지만 의외성과 반전이 가미된 재미있는 경기를 기대한다면, 일찌감치 포스트시즌에 탈락한 팀의 팬으로서 주제넘은 참견일까?
구율화 여성 열혈 야구팬·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