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는 정말 보수적이고 엄격하신 분이셨습니다. 특히 딸인 제게는 더 그러셨습니다. 너무 엄격하고 완고하신 분이라서 아버지 앞에 서면 가슴이 쿵쾅거리는 긴장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어기면 날벼락 떨어질까 두려워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대문 앞에서 초조하게 가슴을 졸이곤 했습니다. 친구들이 아버지를 친구처럼 대하는 걸 보면, 그렇게 스스럼없는 모습이 부녀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서운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가수 이선희 씨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J에게’를 들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선희 씨는 제가 최초로 좋아했던 연예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래에 열광했던 것과 달리 저는 이선희 씨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두며, 연예기사 하나하나를 스크랩해 모았습니다. 강변가요제에서 이선희 씨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섰던 사진도 오려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시면 왠지 날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아버지한테는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무슨 연예인이 좋아서 난리냐며, 노래도 못 듣게 하실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방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신 겁니다. 너무 놀라서 숨도 못 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공부하느라 힘들지? 이거 풀어봐라” 하면서 뭔가를 내미셨습니다.
포장지를 조심히 뜯었는데, 그 안에 뜻밖에도 이선희 씨 얼굴이 담긴 큰 레코드판과 테이프, 브로마이드 사진, 그리고 피아노를 치던 저를 위해 J에게 악보까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아버지만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제게 이런 선물을 해 주시다니… 아버지는 그때까지 늘 제게 무섭기만 하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대부분 허락하지 않으셨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이선희 씨 팬이라는 걸 아버지가 알고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선물을 주시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 했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지만, 감사하다는 마음은 충분히 표현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주신 선물만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 후 거실에 있는 전축에 ‘J에게’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사준 레코드판으로 J에게를 듣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 뭉클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널 사랑하셨는지 넌 모를 거다. 네가 야단맞고 우는 날에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더 괴로워하셨어. 아마 넌 그 마음을 평생 헤아릴 수 없을 거야. 그 마음을 다 어찌 알겠니?” 하셨습니다.
지난 추석 때 친정에 갔다가 ‘J에게’ LP판이 먼지에 쌓여 있는 걸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 때의 추억도 그 때는 그저 무서운 아버지가 왜 이런 걸 내게 주시나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게 저희 아버지의 사랑표현이셨습니다. 그걸 이제야 깨닫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난 추석 때 아버지 얼굴 뵈면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 없게, 지금이라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 같아, 그저 죄송스러운 생각뿐입니다.
광주 서구 | 김혜진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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