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아침편지]어릴적물조리개로‘쏴악’‘인간샤워기’돼주신아버지

입력 2009-08-25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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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이곳은 우리나라 대표 더위도시, 아침이면 “푹푹 찐다 쪄!”라는 말이 절로 나온 대구입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요즘, 퇴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샤워실로 직행합니다.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까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그 때 주인집 앞마당에는 펌프가 하나 있었습니다.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엄마는 펌프질한 물을 아버지 등으로 ‘촤악∼’ 뿌려주셨는데, 그럼 아버지께선 “으으∼ 시원하다∼ 좋다, 좋아∼”라고 말씀하시며 시원하게 등목을 하셨습니다. 그럼 옆에서 지켜보던 남동생이 윗옷을 확 벗어 던지고 아버지 옆에 나란히 엎드렸죠.옆에서 아버지와 남동생이 등목 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얼마나 시원해보이던지… 하루 종일 애들이랑 뛰어논다고 땀범벅이 됐던 저는 그 시원함이 부러웠지만, 명색이 ‘소녀’였던 터라 아버지나 남동생처럼 윗도리를 훌러덩 벗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시원하게 등목을 마치신 아버지께서 “와, 니들도 하고 싶나?”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와 여동생은 땀범벅인 채로 고개만 끄덕끄덕 거렸습니다. 수건을 목에 걸치신 아버지는 창고로 가시더니 파란 천 같은 걸 둘둘 말아서 들고 오시는 겁니다. 그리곤 수돗가와 감나무 사이에 두르시고는 시원한 물이 가득 담긴 빨간 고무 통을 안에 넣어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자, 어여 들어가보래이∼”하는 아버지 말씀에 저와 여동생은 “이야∼”하는 탄성을 지르며 메리야스와 팬티만 입고 빨간 고무 통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그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좋던 지요.

한참을 동생과 물장구치며 놀았는데 갑자기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겁니다.글쎄 아버지께서 좀 더 시원하라고 파란 물조리개로 꽃에 물을 주듯이 위에서 물을 부어주고 계신 거였습니다. “시원하제∼ 이제 좀 살긋나?” 그 소리에 저는 “아부지예, 우리가 나무가? 꽃이가? 와 물을 주노∼”하니까 아버지께선 웃으시며 “아부지한테는 너거들이 이뿐 꽃이제, 뭐꼬∼ 자자 이 물 먹고 예쁘게 쑥쑥 커래이∼ 알긋나∼”라고 말씀하시며 인간 샤워기가 돼서 연신 물을 뿌려주셨습니다.

그 때는 요즘처럼 멋진 샤워기나 깨끗한 욕실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인간 샤워기를 자청해주신 아버지의 물조리개 덕에 시원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파란 천막과 파란 물조리개로 만들어진 멋진 샤워장에서 시원하게 한바탕 놀고 나오면 엄마는 얼음 동동 띄운 오렌지색 가루주스를 한잔 주셨습니다. 우리 삼남매는 그 가루주스 한 잔에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모릅니다.

비록 가난해서 예쁜 수영복에 수영장 한 번 가보지 못했지만, 저는 아버지 덕에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멋진 시원한 여름을 보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합니다.

환갑이 훨씬 넘으신 친정아버지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무뚝뚝한 큰딸, 비록 아버지가 해주셨던 것처럼 멋진 샤워장을 만들어드리지는 못하지만, 이 더운 여름이 가기 전에 아버지 모시고 시원한 계곡에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From. 이숙현 |대구 달서구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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