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미친 바다…긴급 명령…가출호 무사 귀환하라!

입력 2010-04-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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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를 삼킬 듯 바다가 울부짖는다

거센 역풍에 비까지…갈지자 항해

설상가상 메인세일의 줄까지 뚝!

“악화…집단가출…피항…”

불규칙한 교신, 해경의 급박한 외침

일단 이 성난 파도에서 벗어나야 해!

도망치듯 인근 항구로 키를 돌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바다는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새벽 5시 강구항을 떠난 이후 바람은 시시각각 거세져 해안의 정치망 구역을 벗어나기 위해 동쪽으로 3마일 가량 이동했을 때는 파도가 뱃전을 넘어 갑판을 휩쓸기 시작했다. 선실 내부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선실 윗 뚜껑을 닫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역시 그물이다. 암초는 해도에 나타나있어 손쉽게 피할 수 있으나 그물은 육안으로 부표를 직접 확인하고 피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어둡고 거친 바다에서 배가 그물에 걸린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결과를 맞게 될 것이 뻔했다.


정상욱 부선장이 직접 서치라이트를 들고 바우맨(bow man) 임대식과 함께 뱃머리에서 초긴장 상태로 항로를 감시했다. 바람은 정확히 북쪽에서 불어왔다. 동해를 북상하는 집단가출호로서는 완전한 역풍이다.

높이 3m의 파도를 정면으로 뚫고 가는 탓에 피칭(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이 극심하다. 어렵사리 메인세일을 펼치자 배는 20노트에 가까운 속도로 파도를 예리하게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에 돛은 한껏 팽팽해져 마치 쾌속정처럼 빨랐으나 문제는 이 빠른 속도가 목적지로 향하는 속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돛단배가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각도를 기준으로 좌우 45도가 한계. 때문에 역풍에서는 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갈지자(之) 행보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순수 속도는 빠르지만 목표 지점까지의 실제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오전 6시. 풍속은 30노트에 육박했고 파고는 4m를 넘어섰는데 설상가상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앞으로 바다가 더 험해질 것이라는, 은밀하지만 단호한 위협이었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돛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로 인해 바로 옆에 있는 대원과 얘기할 때도 고함을 쳐야했다. 이 지경이니 뱃머리에서 서치라이트를 들고 전방을 감시하는 대원이 “0시 방향에 어구”라고 외치는 소리가 칵핏(조종하는 공간)까지 전달될 리 만무했다. 휴대용 VHF 무전기를 꺼내 전방 감시조에게 건넸다. 불과 40피트(약 12.2m)의 배에서 앞뒤에 있는 사람들끼리 육성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다는 고삐 풀린 황소처럼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2시간째 20노트 이상으로 질주했지만 지그재그로 가는 탓에 목표지점을 향한 실제 속도는 5노트를 밑돈다. 도상거리가 80해리가 넘는 삼척까지 이런 식으로 가자면 적어도 16시간. 난감해진다. 강구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에도 파도가 10초 간격으로 갑판을 휩쓸었다. 파도의 정점에서 골짜기로 떨어질 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안전벨트로 몸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영락없이 배 밖으로 던져질 판이다. 기상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16번 채널로 해경을 호출했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에 교신이 쉽지 않다.

“... 집단... 바랍니다...”

무슨 소린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몇 마디는 확실하게 귀에 꽂혔다.

“... 악화... 피항...”

순간, 탱∼하는 줄 끊어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메인세일의 면적을 줄이기 위해 타이트하게 당겨놓은 축범 아웃홀 줄이 풍압을 못 이겨 끊어져버린 것이다. 축범 줄이 끊어지자 팽팽하던 메인세일은 터진 풍선 꼴이 되어 미친 듯이 펄럭인다. 보통 때라면 새 줄로 교체해 금방 고칠 수 있겠으나 로데오 경기의 말 잔등처럼 널뛰는 갑판 위에서 해내기엔 무리한 작업이었다.

축범 아웃홀 라인이 끊어져 메인 세일을 접은채 엔진을 이용해 축산항을 항해 피항중인 집단가출호. 배의 좌우 양쪽에서 작렬하는 파도가 뱃전을 호시탐탐 넘보고 있는 가운데 대원들이 안전벨트로 몸을 묶은채 선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강풍에 요긴한 스톰 세일은 없고 돛을 줄일 수 있는 축범 줄은 절단됐다. 이쯤 되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즉시 이 성난 바다에서 도망쳐야한다.

가장 가까운 항구를 찾아보니 4해리 거리에 축산항이 있다. 정치망 구역을 피해 직각으로 입항하지면 약 7해리. 고장 난 메인세일을 접어 들여 피항 모드에 돌입하자 바다는 우리를 더욱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추진력을 잃으면 파도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되는 탓이다.

틸러를 잡은 선장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은 안전벨트에 연결된 줄을 짧게 줄인 채 각각 갑판 위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헬멧을 쓰고 웅크렸다. 파도 너머로 축산항의 왼쪽 죽도산 꼭대기에 있는 흰 등대가 보인다. 등대가 9시 방향에 놓일 때까지 배를 북진시킨 뒤 왼쪽으로 90도를 틀어 항 입구를 직각으로 겨냥해 들어간다.

파도가 우현을 타격하며 배를 높이 들어올린 뒤 왼쪽으로 집어던지는 형국이다. 배는 파도에 맞을 때마다 넘어질듯 기울어 갑판 위의 대원들은 거의 벽에 매달린 자세가 됐다. 수심이 깊은 동해의 파도 위력은 서해나 남해의 그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서남해가 툭 툭 던지는 잽이라면 동해는 헤비급 복서의 풀스윙 펀치다.

어선이었다면 100%% 전복될 상황이지만 요트는 어선과 달리 선저 하부의 킬(keel)에 배 무게의 대부분이 쏠려있어 균형 복원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 바람이 불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강구항에 눌러앉아 때를 기다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호랑이 잔등에 탄 채 달리고 있었고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땅에 발을 딛어야만 했다.

교대로 선실로 들어가 전날 미리 준비해둔 삶은 계란으로 요기를 하는데 얼굴에 바닷물을 뒤집어쓴 탓에 소금을 찍을 필요 없이 그저 입술을 핥으면 됐다. 파도와 바람이 자꾸만 항구 왼쪽 어망이 즐비한 곳으로 배를 밀어붙여 항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상당한 집중을 요하는 일이 됐다.

축산항 입구에 근접하자 북쪽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가 하얀 혀를 널름대며 먹이를 노리는 괴수처럼 느껴졌으나 한편으론 대자연의 스펙터클한 장관에 압도됐다. 폭발하는 거대한 파도 때문에 70m쯤 되는 항 입구가 바늘구멍처럼 좁게 느껴진다. 자꾸 왼쪽으로 밀리는 배를 온 신경을 집중해 조종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방이 조용해졌다. 마치 잡음이 심하던 라디오의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마침내 축산항 방파제 안쪽으로 무사히 들어온 것이었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cafe.naver.com/grouprunway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 긴급 대피처 축산항?
영덕군 작은 어항…해안도로 절경

집단가출호가 전혀 예정에 없이 도망치듯 피해 들어간 축산항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의 작은 어항이다. 북쪽은 와우산, 서쪽은 대소산, 남쪽은 죽도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덕분에 사나운 바다에 쫓긴 배들의 피항지로 활용되었다니 우리가 축산항으로 들어간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근의 영덕 강구항이나 울진 후포항에 비해 항의 규모는 작지만 대게 원조마을로 알려진 차유마을과 지척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축산항도 만만찮은 대게의 집산지다. 대게 위판이 열리는 전국 5개항 중 하나지만 관광지가 아닌 만큼 인심이 후하고 질 좋은 대게를 값싸게 맛볼 수 있어 대게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파라다이스로 꼽힌다.

특히 강구항과 축산항을 잇는 26km의 강축도로(918번 지방도)는 국내 해안도로 중 아름답기로 열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절경이어서 자동차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 위판 활동에 지장을 줌에도 불구하고 피항 온 집단가출호에 위판장 앞 정박지를 20일 가까이 선뜻 제공한 축산항 수산업협동조합 관계자들의 따뜻한 배려에 지면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허영만화백 항해 스케치
3월 5일, 양포에서 강구로 올라가는 길 호미곶 부근에서 새 떼를 만났다. 메추라기 크기의 까만색 새 수천마리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바다 위를 가득 덮고 있다. 새들은 배가 근접하면 날아서 피하는 대신 일제히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는데 잠영 모습이 마치 작은 펭귄들을 연상시켰다. 지나는 어부들에게 물어보니 ‘쪽오리’란다. 돌고래처럼 여럿이 협동해 작은 물고기 떼를 포위한 뒤 한 군데로 몰아 잡는 영악한 녀석들이라는 설명이다. 조류 사전을 찾아보니 쪽오리의 정식 명칭은 작은 바다오리. 길 잃은 새(迷鳥, Vagrant)에 속한다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길 잃은 새란 태풍이나 기후 변화 등이 원인이 되어 본래의 서식지나 이동 경로를 벗어난 새를 뜻한다. 쪽오리들은 원래 어디서 살다 길을 잃고 이 곳 동해까지 흘러왔을까? 집단가출호를 타고 바람을 따라 바다를 떠도는 우리들도 결국 쪽오리처럼 길 잃은 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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