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경기시작 1시간 전, 간식도 챙겨먹고 장비점검에 상대팀 분석으로 정신없이 바쁜 덕아웃에 난데없이 들리는 인사소리. 고개를 돌려보면 그 팀의 핵심 투수 한 두 명이 서 있다. 경기가 코앞인데 방금 샤워까지 했는지 청량감 있는 스킨향을 풍기며 파스와 땀 냄새 진동하는 동료들과 인사한 후 총총걸음으로 경기장을 떠난다.
당일경기 후 이동을 앞둔 팀은 대부분 다음 순번 선발투수 1∼2명을 비행기 편으로 먼저 원정지에 보낸다. 다른 선수들은 경기 끝내고 샤워하고 밥 먹고 새벽에야 버스에 몸을 실어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선발투수들이 좀 더 컨디션 조절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이렇게 배려하고 있다. 불펜투수들 대부분이 선발을 부러워하는 것도 이같은 배려와 충분한 휴식보장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불펜에서 대기해야하고 위기상황에서는 몸을 살필 틈도 없이 공을 던져야하는 불펜진은 그만큼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더 크다.
그러나 최근 몇몇 구단 불펜 투수들도 선발진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혹사의 상징 ‘노예’라는 별명까지 있는 한국 프로야구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휴식보장’을 지키는 감독들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7회 아슬아슬한 리드 끝에 역전위기. 상대 클린업트리오를 상대해야 하지만 필승 불펜투수를 아끼는 감독.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종종 욕지거리가 터진다. “투수교체 타이밍을 중학생 내 동생보다 모른다.” “○감독 바보야 ○○은 아껴 놨다 어디에 쓰게?” 감독들도 속이 탄다. 그 누구보다 오늘 이기고 싶다. 자꾸 불펜에 눈이 간다. ‘그제와 어제 연 이틀 고생한건 알지만 오늘 하루만 더!’ 그러나 오늘 당장의 승리보다 선수와 팀의 미래를 길게 내다보는 혜안을 얻은 감독은 순간의 유혹을 이겨낸다.
KIA 조범현 감독은 불펜 투수도 휴식일이면 비행기 태워 먼저 보낼 정도로 구원진의 휴식을 철저히 보장한다. 삼성 선동열 감독은 가끔 경기 전 취재진 앞에서 “오늘은 ○○은 절대 안 쓴다”고 공언한다. 현역시절 완봉한 다음날 3이닝 세이브도 해봤다는 넥센 김시진 감독은 불펜피칭 개수까지 꼼꼼히 따지며 투수를 보호한다. 당장 보이지 않지만 제 살을 깎아 피로 얻은 승리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패배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다.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