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 스포츠동아DB
“양반은 권력 뒤에 숨고, 광대는 탈 속에 숨고, 칼잡이는 칼 뒤에 숨는다는데, 난 숨을 데가 없더라고.”
궁중에서는 왜적의 침입 앞에서 당쟁을 일삼고 민초들은 피할 곳 없는 혼돈의 시대. “같이 먹고 같이 굶고 같이 살고 같이 죽”는 세상을 꿈꾸며 대동계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서지만 그것은 칼의 ‘앞’일 수도, ‘뒤’일 수도 있다.
검객 이몽학(차승원)은 ‘앞’을 택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쓰러뜨리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고 왜적을 막는 길이라 여겼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권력욕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이몽학은 칼 ‘앞’에 나서 권력자를 제거하지만 이는 권력자의 서자로 ‘개새끼’라 불리며 천대받는 삶을 사는 ‘견자’(백성현)의 복수를 부른다.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은 그러지 않았다. “칼잡이는 칼 뒤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잡이가 칼 ‘앞’에 나설 때, 세상은 온전히 보이지 않고 오로지 또 다른 권력욕일 뿐이며 “같이 먹고 굶고 같이 살고 죽”을 수 없는, “같이 죽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차승원이 황정민, 백성현, 한지혜 등과 주연하고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바로 그 물음의 답을 놓아둔 두 갈래 앞에 서 있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로 이어지는 사극의 연장선에서 감독 이준익은 그 답 대신 ‘결국 조정과 권력과 세상과 민초가 갈등으로 얽히고설킨 질곡의 세상은 끝도 없이 혼돈스러울 뿐이며 그 끝에 스러지는 것도 결국 민초들이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듯하다. 이렇듯 강렬하고 명징한 메시지는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인지 모른다. 다만, 그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이고 구체적이며 절절하게 다가설 수 있을지가 관건일 뿐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미덕은 고속촬영으로 보여지는 차승원·황정민, 차승원·백성현의 ‘합’으로 이뤄지는 검객들의 결투 장면이다. 청각을 한껏 자극하는 칼 휘두름의 음향과 배우들의 잘 짜여진 액션 연기는 그러기까지 이들이 쌓아온 캐릭터와 스토리의 절정을 이루며 관객의 시선 속으로 스며든다.
차승원과 한지혜, 한지혜와 백성현의 절제된 멜로적 감성도 사극의 한 표현방식으로서 신선하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