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악! 돛이 찢어졌다”…눈물의 동해 표류기

입력 2010-05-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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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을 지나온 동해 바다는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그 차고 억센 바다를 건너는 일은 선원들에게 칼끝같은 긴장과 노동을 요구한다. 집단가출호의 선체에 부딪쳐 갈라지는 검푸른 파도가 지난한 항해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허영만화백 항해 스케치.

폭풍이 몰아쳐도, 산더미 같은 파도가 달려들어도 끼니때마다 꼬박 꼬박 먹어야 산다.

집단가출호 항해 중 주요 식사 메뉴는 삶은 고구마, 삶은 계란이다. 차가운 바다 위인지라 따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하지만 좌우, 상하로 쉴 새 없이 요동치는 배 안에서 뭔가를 끓이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도전이다.

항해 초기에는 찌개 요리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찌개냄비를 뒤엎는 쓰라린 경험을 몇 차례 한 뒤 뚜껑이 단단히 잠기는 압력밥솥에 고구마와 계란을 쪄먹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항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당분간 계란과 고구마는 냄새도 맡기 싫어진다.

금진항에서 속초로 올라가는 바닷길. 새벽에 합류한 송영복 대원이 강릉에서 걸쭉한 돼지국밥을 싸왔다. 고구마와 계란에 신물이 난 대원들에게 특식을 먹이려는 갸륵한 일념...

그날따라 파도가 높아 국밥을 뜬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고 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력은 놀라웠다.

우리는 곧 파도와 숟가락질의 리듬을 맞추는 비결을 터득해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16.마지막 해안선 항해
봄바다는 사나웠다. 풍압을 못견딘 지지대 결국 툭! 메인 세일이 30cm나 찢어져 버렸다. “그냥 두면 더 위험해” 돛 교체 돌입 추진력 잃은 배는 파도에 떠밀리고… 요동치는 갑판위 작업 악전고투 연속. 항해후 선원 모두 녹초가 돼버렸다집단가출호의 11차 항해는 4월 9일 울진 후포에서 시작됐다. 3월 10차 항해에서 뜻밖의 폭풍을 만나 강릉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영덕 축산항으로 피항했다가 후포로 배를 옮겨뒀던 것이다.

2주 동안 집단가출호를 돌봐준 경북요트협회 김종찬 전무와 이정근 사무국장의 배웅을 받으며 후포항을 빠져나와 북쪽을 향한다. 바깥 바다에 너울이 심해 고깃배들이 조업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그저 흘려들었는데 과연 파도가 만만찮다.

4월 9일 항해거리 90Km 오전 7시 경북 울진군 후포항 출항 오후 4시 강원 삼척시 장호항 도착 4월 10일 항해거리 50Km 오전 9시 삼척시 장호항 출항 오후 4시30분 강원 강릉시 금진항 도착 4월 11일 항해거리 85km 오전8시 강릉시 금진항 출항 오후5시 강원 속초시 청초호 도착


파도의 진행 속도와 방향에 배의 움직임을 일치시키면 높은 파도 위에서도 안정적이며 조용한 항해가 가능하지만 아마추어 세일러인 우리들에게 그런 내공은 아직 없었다.

가끔 파도에 추월당해 엇박자가 날 때면 격렬한 피칭(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이 일어나 배의 방향이 틀어지곤 한다.

이럴 때 제일 위험한 것이 돛을 지지하는 붐이 홱 돌아가는 와일드 자이빙이다. 뒷 바람을 받느라 돛을 열어두고 있는 상황에서 파도에 밀려 진행 방향을 놓치면 갑판에 서있는 사람의 머리 높이에 매달린 금속제 붐이 마치 야구 방망이처럼 강하게 스윙되기 때문이다.

죽변을 지날 무렵 바람은 더욱 강해졌다. 3m 높이의 파도가 검푸른 커다란 물의 벽을 이룬 채,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고 먹이를 노리는 코브라처럼 뒤를 쫓는다.

파도의 정점 위에서 좌현으로 기운다 싶은 순간, 우려하던 와일드 자이빙이 일어났다. 풍압이 마스트와 붐 끝에 집중되며 로프와 돛, 그리고 금속 부품들이 합세해 발생시키는 와일드 자이빙의 소음은 끔찍했다.

모두 헬멧을 쓰고 자세를 바짝 낮추고 있었던 덕분에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메인 세일이 찢어져버렸다. 가까스로 배를 바로 잡고 돛을 살펴보니 찢어진 부분의 길이는 대략 30cm. 이대로 놔두면 점점 더 많이 찢어질게 뻔했다.

돛을 내리자 추진력을 잃은 배는 파도와 바람에 난타 당해 이리저리 표류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손상된 돛을 예비 돛으로 바꾸는 것은 곡예에 가까운 동작을 요구했다. 성난 황소의 등에 탄 것처럼 요동치는 갑판에서 돛을 바꾸는 일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고, 오후의 해풍이 돌풍을 일으켜 장호항에 도착했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만큼 녹초가 되었다.

“우리 뭐 잘못한 거 있나? 혹시 여기서 야영하면 불법인거 아냐?”

4월10일 새벽 1시. 장호항의 기암괴석 사이로 난 관광용 산책로의 데크에서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비박 중이던 대원들은 다가오는 경찰차의 경광등을 보며 살짝 불안해졌다.

“우리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닐 꺼야. 동네사람들도 괜찮다고 했고, 해양경찰도 OK했는데 설마….”

하지만 해안 도로를 따라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달려온 경찰차는 결국 우리 앞에 멈춰 섰고 켕기는 게 있는 우리들은 침낭에서 상체만 내놓은 채 앉아 얼음처럼 굳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경찰차 문이 열리며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개인사정으로 서울에서 뒤늦게 출발한 허영만 선장과 정상욱 부선장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우리에게 허 선장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심야 버스를 타고 임원에서 내리긴 했는데 오밤중에 장호항까지 올 방법이 없어. 택시도 안보이고… 난감해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는데 그게 마침 파출소 옆이더라고. 딱하게 여긴 순경 아저씨가 순찰차로 태워다 주신거야.”

경찰관은 그제서야 “혹시 허영만 선생님이십니까? 식객?”하며 놀란다. 자신이 태우고 온 사람이 만화가 허영만임을 그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강릉 바로 아래인 옥계 금진항까지 진출한 우리는 이튿날인 11일 속초를 향해 돛을 올렸다. 정동진, 안인, 안목을 지나자 비로소 동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이 실감난다.

지난해 6월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을 떠나 11개월 만에 서해, 남해를 다 돌고 이제 동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감회에 젖었다. 옅은 해무 사이로 희미하게 오대산, 점봉산 등 육지의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름층 위로 불쑥 솟은 내륙의 산악을 감상하던 중 품격이 남다른 거대한 봉우리가 포착됐다.

집단가출호 선원들이 거친 파도를 뚫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은 항해 끝에 만나게 되는새로운 안식처에 대한 기대때문이기도 하다. 항해중 돛을 교체하는 악전고투 끝에 닿은 강원도 삼척시의 장호항. 야영지에서의 저녁밥은 꿀보다 달았고, 텐트는 오성호텔이 부럽 지않았다.


아, 설악산 대청봉! 서북릉과 화채릉을 거느린 설악이 동해에 떠 있는 우리를 위엄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문진, 양양을 지나 드디어 속초항 쪽으로 선회하자 설악산은 잡힐 듯 가까워졌고 울산암까지 보인다.

배는 속초항 안쪽으로 깊숙이 위치한 석호(潟湖)인 청초호로 들어간다. 석호는 내륙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의 하구에 바닷모래가 퇴적되며 생긴 호수로 청초호는 설악산 동쪽 사면 골짜기를 통해 흘러내린 물로 이뤄져있다.

배는 한국 전쟁 당시 피난 온 함경도 사람들이 정착해 만든 아바이마을, 청호동의 좁은 수로를 거슬러 올라간다. 아바이마을 선창엔 60∼70년대 영화 세트 같은 낡고 납작한 판잣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혹시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

집집마다 걸려 있는 오징어를 본 적이 있는지

오징어 배를 가르면

원산이나 청진의 아침햇살이

퍼들쩍 거리며 튀어 오르는 걸 본 적이 있는지

그 납작한 몸뚱이 속의

춤추는 동해를 떠올리거나

통통배 연기 자욱하던 갯배머리를 생각할 수 있는지…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이상국)

판잣집들은 대부분 생선구이집, 아아비순대국집 등 식당과 어물전들….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수로 건너 중앙동의 양안에 줄을 연결하고 그 줄을 잡아당겨 움직이는 이 동네 명물 갯배가 느릿느릿 우리 앞을 가로지른다.

속초 청초호에 도착함으로써 집단가출호는 동해 해안선 항로를 마쳤다. 이제 전국일주항해의 대장정 중 피날레인 울릉도와 독도만을 남겨두게 됐다.■ 속초 청초호?교량 건설…천혜 마리나 상실 위기속초 청초호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혜의 마리나(요트의 정박소)다. 뒤로는 아름다운 설악산이 있고 앞쪽으로는 푸른 동해와 곧바로 연결되는 자연 항구로 해외의 어떤 아름다운 항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 청초호가 마리나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있다.

속초항을 통해 청초호로 들어가는 수로의 어귀에는 수로의 양쪽을 잇는 대형 교량이 건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사는 90% 이상 진행되어 가운데 부분의 상판 하나만 연결하면 마무리된다.

이 다리가 완공되면 갯배를 타고 건너거나 차량으로는 청초호를 한바퀴 빙 돌아야 건너편으로 갈 수 있었던 지역 주민이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마스트(돛대)가 높은 세일링 요트는 마지막 상판이 연결되는 순간 청초호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전국적으로 많은 예산을 들여 마리나가 건설되고 있고, 강원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양양 수산항, 강릉 안목항 등에 대규모 요트 마리나가 건설 중이다. 한쪽에서는 없던 마리나를 새로 만들고, 한쪽에서는 천혜의 자연 마리나가 다리 건설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청초호 다리는 조만간 완공될 예정이어서 어쩌면 집단가출호가 청초호 안쪽으로 들어간 마지막 요트가 될지도 모른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cafe.naver.com/grouprunway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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