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감독에 밀려난 아픔, 10년 만에 깨끗이 씻어내
“솔직히 전 한 게 없습니다. 선수들이 잘해줬습니다. 첫 승을 했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는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기쁘고 좋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승리보다 17일 아르헨티나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 감독은 그리스를 잡으면서 사무친 한(恨) 두 가지를 털어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포함해 7차례 본선에서 한국인 사령탑으로는 단 한 번도 거둬보지 못한 승리를 이번 월드컵에서야 거뒀다. 그 중심에 허 감독이 있었다. 월드컵 본선 무대 진출 56년 만에 이뤄낸 성과가 허 감독의 몫이 됐다.
허 감독은 또 개인적으로 2000년 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나 월드컵호를 두 차례 외국인 감독에게 내준 뒤 처음 출전한 무대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뚫어 자존심을 세웠다. 이젠 굳이 외국인 감독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허 감독은 1998년 올림픽 및 대표팀 감독에 올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그해 아시안컵에서 성적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밀려났다. 공교롭게도 허 감독 이후 2001년 초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뒤 움베르투 코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러,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까지 줄곧 외국인이 한국 축구를 쥐고 흔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16강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4강까지 끌어올렸다. 2007년 말 베어벡 감독이 떠나면서 다시 국내파로 지휘봉이 돌아오며 허 감독이 맡았다. 그로선 ‘역시 국내파는 안 돼’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총력전을 벌였다. 그 결과 국내파 사령탑 월드컵 첫 승이 나온 것이다.
허 감독의 환골탈태한 변신도 눈에 띈다. 절대 자기 스타일을 굽히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다. 진돗개로 불릴 정도로 고집이 셌던 허 감독은 철저하게 지시형 지도자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그 방식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 뒤 180도 방향을 선회했다. 화합, 자율, 긍정 세 가지를 강조했다. 요즘 허 감독은 인자한 이웃집 아저씨다. 훈련할 때나 식사할 때나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선수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은 하지만 절대 몰아치진 않는다. 칭찬도 많아졌다. 하지만 철저하게 실력으로 평가한다. 외국인 감독들이 보여줬듯 학연, 지연, 인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한다. 졌을 땐 “내 책임이다”고 했고 이기면 “선수들이 잘했다”고 했다. 허 감독의 유쾌한 변신이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포트엘리자베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