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야기]그래도 ‘내일’이 있기에…

입력 2010-06-22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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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파나바파나’의 부진<남아공대표팀 애칭>

개최국 남아공이 16강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은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국인 한국의 당시 상황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당시 한국은 나라 전체가 축구로 하나가 됐고 팀도 4강에 올랐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영향도 있지만 한국을 4강까지 올려놓은 건 한마음에서 나오는 엄청난 기운 덕분이다.

지금 남아공은 조별리그 통과에 기적을 바라야 하는 상황이다.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한 첫 개최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남아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16일 소웨토 시내에서 하루를 보냈다. 소웨토는 남아공 민주주의가 잉태된 곳이다. 34년 전인 1976년 6월 16일 남아공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맞서 시위에 나선 수백 명의 학생이 경찰의 무력 진압 속에 학살됐다. 이 사건은 더욱 거센 저항을 일으켰고 소웨토 주민인 넬슨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결국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이끌었다.

나는 34년 전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시작된 지점 부근의 한 식당에서 이곳 주민들과 함께 TV로 남아공과 우루과이의 경기를 보았다. 이 나라의 ‘맥박’을 느껴보고 싶었다. 이날 소웨토 주민들의 바파나바파나(남아공 축구대표팀 애칭)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남아공이 0-3으로 패한 뒤 옆에 있던 시피웨 들로모 씨(40·석유회사 근무)가 이렇게 말했다. “이게 현실이군요. 우리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꿈꾸었지만 불가능한 꿈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지요.”

그는 소웨토 출신인데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살지만 이 경기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날은 소웨토 학살을 기리는 ‘청년의 날’이었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노트북과 귀중품을 요하네스버그의 호텔에 두고 나왔는데 나와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웨토는 남아공의 ‘화해’가 시작된 상징적인 곳이고 외국인에게도 매우 안전하다. 경기가 시작됐을 때 250여 명이 가득 찬 식당에 백인은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들은 우리를 똑같이 대했다.

사람들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지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예상 스코어를 얘기했다. 대부분은 남아공이 2-1이나 1-0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전반 24분 우루과이에 선제골을 내주고 후반 31분 남아공 골키퍼 이투멜렝 쿠네까지 퇴장당하자 식당 곳곳에서 장탄식이 터졌다.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던 소웨토 출신의 샘 마코무 씨는 부부젤라보다 더 큰 소리로 TV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곧이어 페널티킥으로 추가골을 내주며 남아공의 희망은 사라졌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분노보다는 가벼운 체념의 분위기였다. 팀이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때 쉽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을 주로 봤던 영국인인 나로선 생소한 장면이었다.

한 여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거 아세요? 그래도 예전 우리가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보다 이번이 더 나았다는 걸요. 바파나바파나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 이들이 세계를 놀라게 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던 거죠.”

아마도 다음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아공에서

잉글랜드 칼럼니스트 ROBHU800@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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