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만난 사람] 김응룡 “10번 우승 대단? 선동열 나보다 뛰어나”

입력 2010-10-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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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앞둔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꿈속에서 국가대표 4번타자다. ‘야신’을 이긴 명장이었지만 프로야구단 사장이 된 후 감독과 야구 얘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현장을 존중하며 한국시리즈 2회 우승을 뒷받침했다. 대구|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일흔을 앞둔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꿈속에서 국가대표 4번타자다. ‘야신’을 이긴 명장이었지만 프로야구단 사장이 된 후 감독과 야구 얘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현장을 존중하며 한국시리즈 2회 우승을 뒷받침했다. 대구|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침묵은 금이라고 한다. 그의 감독시절이 딱 그랬다. 24승에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에게도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가 최고의 칭찬이었다. 말 보다는 행동으로 불어넣은 긴장감. 스타군단을 휘어잡은 무언(無言)의 카리스마. 그래서인지 그의 가을은 항상 금빛이었다.

100년의 역사가 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감독으로서 월드시리즈 최다우승은 7번(조 매카시, 케이시 스텡걸)이다. 한국시리즈 통산 10번의 우승.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연패. 그의 기록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것도 불과 30세가 안되는 한국프로야구에서….

하지만 이제 그는 덕아웃을 떠나 먼발치에서 야구를 본다. 2004년 12월 야구인으로서는 최초로 야구단 사장에 취임했을 때, “있는 듯 없는 듯 구단 사장 하겠다”던 그 약속 그대로다. SK 김성근 감독에게 ‘야신’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또 그 야신을 이겼던 명장. 찬 바람이 불면 아직도 설렌다는 삼성 라이온즈 김응룡(69) 사장을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만났다.


○아직도 안타치는 꿈꾸는 일흔의 청춘

얼마 전에도 꿈을 꿨다.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있었다”고 했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덕아웃에서 사인을 내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아뿔싸. “내가 타자로 나가서 라이트 앞에 깨끗한 안타를 쳤어. 홈런? 그것도 10번 야구 꿈꾸면 1번은 나오지. 허허.” 선수생활을 마감한 지는 이미 4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시절이 그립다.

꿈은 억압된 욕망의 반영이라고 한다. 그의 무의식중에는 여전히 1960년 대 국가대표 4번 타자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물론 꿈속에서조차 ‘일흔의 현실’과 충돌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라이트 앞 안타를 치고도 1루에서 죽지 뭐야. 하하. 그래도 그런 꿈꾸는 게 좋지. 감독으로 나오는 꿈? 그런 건 거의 안 꿔요.” 야구 생각만 하면, 그는 아직도 20대 청춘이다.




○성공가도만 달렸다고? ‘연습생 신화’의 원조 김응룡 사장

그래서인지, 열심히 하지 않는 2군 선수들을 보면 더 답답하다. 김 사장은 현재 경북 경산에 위치한 삼성 볼파크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새벽에 방망이 돌리는 애들이 많지 않아. 야구 했던 친구들 만나면 그런 얘길 해요. ‘요즘 애들은 길에서 돈이 굴러다니는데도 못 줍는다’고. 우리 때는 프로야구가 있는 일본이 얼마나 부러웠다고….”

김 사장은 ‘연습생 신화’의 원조격이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당시 최강이던 농협에 입단을 타진했지만, 감독 얼굴도 못 보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후 한국운수에 정식계약서도 없이 들어갔다.

“매일 아침마다 신당동에서 남산까지 한 달음에 달렸지. 그리고 남산에 타이어 매달아 놓고, 계속 방망이를 쳤어. 그 타이어를 누가 훔쳐 가면 500원 주고 또 달고….”

결국 그는 국가대표가 됐다. 농협은 뒤늦게 입단을 타진했지만, 불같은 성격의 김 사장은 제안서를 찢어버릴 정도로 근성이 대단했다. 남들은 그를 성공한 야구인으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엘리트 코스만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스타군단을 자기 휘하에 놓을 수 있었다.


○야구모르는 사장이나 야구 얘기 하는 법

마음이 덕아웃을 지나쳐 이미 그라운드까지 닿아있는데, 야구를 보면 오죽 할 말이 많을까. 특히 큰 경기라면. 하지만 그는 “야구를 모르는 사장들이나 현장에 대고 야구 얘기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작전의 결과는 2가지. “성공 아니면 실패다.” 거기에다 대고 입을 열기 시작하면, “감독 못해 먹는다”는 것이 명장 출신의 지론이다.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합작한 제자이자, 현재 삼성의 사령탑인 선동열 감독에게도 야구 얘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솔직히 나도 경기를 보면, ‘마음속으로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그런데 (선 감독이랑) 딱 맞을 때도 있어요.” 고수끼리는 통하는 법이다. 마치 주유와 제갈량이 적벽대전을 앞두고, 한 마디 의논 없이도 손바닥에 똑같이 ‘화(火)’자를 그린 것처럼….

“10번 우승이 대단하다고? 나 사장으로도 우승 2번 더했으니 12번이에요. 하하. 하지만 그 기록은 선 감독이 넘어설 거야. 나보다 더 뛰어나니까. 나는 이제 대구에 4만 명 들어가는 야구장 짓는 일에 힘쓰고 싶어요.” 그는 감독시절의 추억을 넘어, 구단 사장으로서 마지막 소임도 잊지 않았다.

일흔의 청춘은 “오늘도 조용히 야구를 볼 것”이라고 했다. “내 평생 단풍구경 해 본 적 없어. 그래도 난 포스트시즌을 즐겼으니 됐어요. 페넌트레이스 첫 경기 때는 신경안정제 먹어본 적 있어도 포스트시즌 때는 떨어본 적이 없거든.” 한국야구의 거목. 그는 또 다시 단풍 빛깔보다 더 짙은 열정으로, 가을잔치 맞을 채비를 마쳤다.

대구|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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