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태극마크 …고창성 스토리

입력 2010-11-03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오직 재활의 긴 터널을 탈출해본 선수만이 알 수 있다. 야구선수가 공을 만지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를…. 그래서 고창성은 던지고, 또 던져도 한 없이 새로운 원기가 충전된다. 사직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난 국가대표 마당쇠…전경기 출격도 OK!
고창성(26·두산)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야구국가대표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생애 처음으로 국제무대를 밟는다.

그러나 그는 예상외로 덤덤했다. “대표팀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표정에서 들뜨거나 기쁜 내색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 국가대표만큼 중요한 건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창성은 경성대를 졸업하고 2008년 2차 2번(전체 13위)으로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스카우팅리포트에는 ‘사이드암투수지만 140km대의 빠른 볼을 던지고 변화구 구사능력도 좋다. 경기경험이 풍부하고 연투가 가능해 즉시전력감’이라고 기술돼 있다. 특히 공의 움직임이 좋아 타자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투수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프로에 입단한 첫 해, 팔꿈치가 아팠다.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4월 개막전 무대를 밟지 못한 채 재활에 돌입했다. 재활기간에 공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다. 1군도 아닌 2군 경기를 지켜보며 ‘마운드에 올라가서 던지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만 줄곧 했다.

그리고 2009년, 그는 그토록 바라던 마운드에 올랐다. 그것도 ‘필승계투’로서였다. 64경기에서 74이닝을 던져 방어율 1.95(5승2패·16홀드)를 기록했고, 그해 전직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로부터 신인왕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다. 고창성은 단번에 신인들에게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2010년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지명된 LG 신정락이 “주위 사람들이 ‘신인은 고창성 만큼만 하면 된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고창성 선배를 뛰어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힐 정도였다.

2010년에도 고창성은 73경기에 나가 82이닝을 소화하며 22홀드를 기록했다. 방어율이 3.62로 다소 높았지만 임태훈, 이재우가 빠진 ‘허리’를 정재훈과 함께 단단히 지켜줬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는 10경기 모두 등판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어진 국가대표 훈련. 지칠 만도 한데 고창성은 “던지라면 던져야 한다”고 했다. 오히려 “아시안게임도 5경기 모두 나가면 더 좋다”는 여유를 부렸다.

이토록 악착 같이 등판하려는 이유를 묻자 “2008년에는 마운드 위에 설 수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꾸준히 경기에 나간다. 그것도 팀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게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모를 거다. 예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힘든 것도 아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절실해봤기에 기회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창성은 1일 사직에서 열린 KIA와의 평가전에서도 1.2이닝 동안 1탈삼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날 가장 타격감이 좋았던 KIA 김다원에게 볼넷을 하나 내주긴 했지만 등판한 4명의 투수 중 유일하게 실점하지 않았다.

강민호도 “고창성의 볼이 가장 좋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럼에도 그는 “이게 잘 던진 건가요?”라며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평가전에서 잘 던지면 첫 경기(대만전)에 나갈 수 있고, 첫 경기에서 잘 던지면 두 번째 경기에 또 나갈 수 있고, 그때도 잘 던지면 아시안게임 5경기에 다 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그의 말이 단순히 자신감이 넘쳐서 의례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닌 이유다.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