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때 1998년 방콕AG 출전…ML진출 발판
프로선수들의 올림픽 및 아시안게임 출전이 허용된 1998년 이후 한국야구는 프로와 아마를 망라한 최강의 진용, 이른바 ‘드림팀’을 구성해 국제무대를 평정해왔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거침없는 기세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우뚝 섰다. 그 으뜸 원동력은 역시 투타에 걸쳐 핵심전력으로 자리 잡은 프로선수들. 그러나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유일한 아마선수로 이름을 올린 김명성(중앙대)처럼 그간 드림팀에선 적잖은 ‘아마의 동생’들이 ‘프로의 형’들을 도와 태극마크를 빛냈다.양과 질, 모든 면에서 아마선수들이 제 몫 이상을 한 대회는 드림팀이 공식 출범한 1998방콕아시안게임. 총 22명의 선수 중 투수 강철민 경헌호 김병현, 포수 홍성흔, 내야수 강봉규 강혁 신명철 황우구, 외야수 박한이 장영균 등 10명이 아마였다. 당시 성균관대 2학년이던 김병현은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6이닝 퍼펙트의 눈부신 투구를 바탕으로 이듬해 애리조나에 입단하며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방콕대회 금메달로 얻은 병역혜택 덕에 프로에서 환영을 받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잠수함 투수 정대현이 주목을 받았다. 경희대 4학년이던 정대현은 24명의 선수 중 유일한 아마. 구속이 140km에도 미치지 않았던 그의 발탁을 두고 당시 설왕설래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막상 두 차례의 미국전에서 13.1이닝 동안 방어율 1.35로 호투하자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프로 스카우트들의 관심 밖이었던 정대현은 시드니올림픽을 계기로 SK에 지명 받았다. 하지만 아마선수들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정재복)을 끝으로 메이저 국제대회에 호출 받지 못했다. 대신 야구월드컵과 대륙간컵이 그들의 주무대가 된다. 김명성은 실로 8년 만에 다시 아시안게임 이상의 메이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아마추어 선수인 셈이다.정재우 기자 ja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