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한예슬의 촬영펑크, 배우다운 행동일까

입력 2011-08-23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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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친 그녀보다
‘환상’ 깬 그녀가 밉다

‘스파이명월’의 주인공 한예슬(왼쪽)과 에릭. 빡빡한 촬영 일정을 문제삼아온 한예슬은 한동안 촬영을 거부해 1회분이 결방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동아일보DB

“인간은 과연 인간적인가.” 한갓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한 원숭이를 통해 움직이는 욕망의 내면을 소스라칠 만큼 무섭게 묘사한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혹성탈출’·17일 개봉)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인간의 뇌기능을 향상시키는 신약 개발을 위해 무자비하게 원숭이를 실험대상으로 이용하는 인간은 ‘비인간적’인 반면, 말 한마디 할 줄 모르지만 인간보다 더 큰 사랑과 공포를 느낄 줄 아는 유인원이야말로 ‘인간적’이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한참 방영되던 TV 드라마의 촬영을 돌연 거부하고 배우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 놓아 외치며 미국으로 떠났다가 하루 만에 돌아온 톱 배우 한예슬을 보면서 문득 혹성탈출을 떠올리게 되었다. 발가락까지 예쁜 한예슬과 못생긴 원숭이가 무슨 관계냐고? ‘인간은 인간적인가’라는 이 영화 속 질문은 한예슬을 두곤 이런 유사질문으로 고스란히 변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과연 배우적인가.’

배우는 자신이 연기해내는 캐릭터를 통해 일정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또 이 환상을 대중에게 팔아먹으면서 먹고사는 존재다. 대중은 배우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연기가 진짜로 그 배우의 인간됨이라고 착각하면서 그 배우를 소비한다. 어떤 배우가 등장하는 CF를 보면서 ‘저 차를 타고 저 음료를 마시면 나도 독고진 같은 멋진 존재가 될 수 있겠지’라는 환상에 빠지기에 대중은 그가 선전하는 상품을 주저 없이 구매한다. 그래서 진정한 배우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대중에게 심어준 판타지에 끝까지 책임을 진다.

한예슬의 행위를 두고 ‘시청자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몰지각한 짓이었다’는 뻣뻣한 비판을 하고 싶진 않다. 노동자가 파업을 벌일 수 있듯이 ‘연기’라는 노동을 수행하는 배우도 당연히 노동조건을 이유로 파업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나는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30%에 육박했다면 결코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오히려 이번에 한예슬이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은 배우로서 ‘배우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예슬은 드라마 한 편으로 수천만 원의 몸값을 받는 톱 배우다. 그렇지만 대부분 대중은 ‘왜 하루하루 개미처럼 일하는 나는 한예슬처럼 벌지 못할까’ 하면서 한예슬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톱스타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톱스타를 천상의 존재라 착각하고, 그래서 톱스타가 우리 ‘민간인’으로선 꿈도 못 꾸는 천문학적 수입을 벌어들이는 일 또한 톱스타의 멋진 권리라고 생각한다. 톱스타의 수입마저도 대중에겐 아름다운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에게 환상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하다. 배우에게 품었던 대중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 배우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이번 한예슬 사태에서 대중이 한예슬에게 가장 실망했던 것은, 그녀가 사고를 쳤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꿈속 존재’인 것만 같던 톱스타가 초라한 월급쟁이들과 똑같이 죽도록 일하고 잠 못 잔다고 해서 불평을 늘어놓고는 ‘확 때려치울까’ 생각하는, 평범하고 ‘찌질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는 데 있다.

톱스타도 인간이다. 하지만 CF 한 편 출연으로 수억 원대를 벌어들이는 ‘인간’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배우는 배우적이어야 하고, 톱스타는 톱스타적이어야 한다. 스타의 권력이 대중으로부터 나온단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는 더는 스타가 아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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