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몽골야구전도사 조청희 “제대로 된 글러브·배트 하나 없지만…드넓은 몽골초원 ‘야구의 꿈’ 꽉 채웠죠”

입력 2011-09-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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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이 땅에 야구를 전파한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한국은 변방에 야구를 전파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 주역이 몽골에 파견됐던 조청희 전 한화 트레이닝 코치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이 땅에 야구를 전파한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한국은 변방에 야구를 전파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 주역이 몽골에 파견됐던 조청희 전 한화 트레이닝 코치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경기장 단 1곳인 ‘야구 불모지’
몽골 꿈나무들과 3개월 뒹굴어
훈련시간 줄이고 경기수 늘려
흙먼지 나눠 마시며 야구 전파

이 악물고 뛰는 아이들의 열정
오히려 제가 한수 배웠습니다
난해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태국에 0-15로 5회 콜드게임패를 당한 야구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있었다. 24명 엔트리를 채울 선수가 없어 12명으로 대회에 참가한 몽골 대표팀의 이른바 ‘방망이 온정사건’이었다. 이들은 값비싼 나무배트를 구입할 여건이 안 돼 평소 알루미늄배트를 사용한다. 하지만 국제대회에선 나무배트 외에 쓸 수 없다.

결국 선수들은 단 한 자루의 방망이만을 들고 광저우에 입성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아시아야구연맹(BFA) 회장국인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대만이 방망이 세 자루씩을 지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 일을 계기로 야구 불모지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결정했다. 첫 번째 걸음이 조청희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 트레이너(전 한화 트레이닝 코치)를 야구지도자 자격으로 몽골에 파견한 것이다.

3개월간 몽골 야구 꿈나무들과 생활한 뒤 최근 돌아온 조 코치는 “내셔널팀이 어떻게 꾸려졌을까 싶을 정도로 선수들의 수준이나 환경 요인이 열악했다”며 “그러나 야구를 순수하게 즐기는 모습과 열정에서 오히려 내가 야구인으로서, 또 지도자로서 초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야구장은 단 한 곳뿐. 이곳에서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구슬땀을 흘린다. 사회인 야구 수준의 시설이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사진제공|조청희.

제대로 된 야구장은 단 한 곳뿐. 이곳에서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구슬땀을 흘린다. 사회인 야구 수준의 시설이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사진제공|조청희.



○야구 불모지 몽골의 현실

몽골에는 총5개의 야구팀이 있다. 5명의 지도자가 20명씩을 맡고 있으니 잠정적인 야구선수가 100여 명 남짓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제대로 된 야구장은 1개뿐. 조 코치는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고민에 빠졌다. ‘100여 명의 선수들을 어떻게 한 곳에서 훈련시키나.’

마침 몽골에 파견된 일본인 코치가 있었다. “어떻게 이 많은 애들을 한 곳에서 가르치냐?”고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 코치는 “걱정 말라”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딱 3일이 흐르자 그의 말뜻이 뭔지 깨달았다. 하루에 야구장을 찾는 아이들은 많아야 20∼30명에 불과했다.

“아직 몽골에는 야구가 널리 보급된 상태가 아니에요. 선수라고 해도 사회인야구처럼 즐기는 수준인 거죠. 재미있는 건 11시에 훈련이 시작된다고 공지하면 11시30분쯤 한 두 명이 구장에 나타나요.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는데 생각해보니 땅덩어리는 넓지만 인구는 적고, 또 유목민족이라 뿔뿔이 흩어져 살더라고요. 이동거리가 멀고 유목민족이라 그런지 도시 사람들처럼 뭔가에 쫓겨 살지 않아요. 한국의 코리안타임처럼 자신들의 타임을 갖고 살더라고요.”

게다가 환경적으로도 몽골은 야구를 하기 힘들다. 6월부터 8월까지를 제외하고는 너무 추워 야외운동을 엄두도 못 낸다. 조 코치는 “5월에도 눈이 쌓인다. 6월부터 딱 3개월만 따뜻한데 그때 학생들이 방학을 하고 그 시기에 야구를 한다”고 설명했다.


○가르침? 즐기는 방법으로 야구 전파

상황이 이러니 ‘실력’이라는 평가의 잣대를 대는 것도 사치다. 그저 흙바닥에서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게 좋을 뿐이다. 그래도 열정 하나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텐데 메이저리그나 일본프로야구 선수의 모습을 곧잘 흉내 내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조 코치의 ‘가르침’은 3일천하로 끝났다.

“저는 ‘지도자’로 갔는데 사실 가르칠 게 없었어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단계조차 아니었거든요. 파견 온 분들과도 ‘한국에서 야구가 정착하는데 70∼80년이 걸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야구를 하는 즐거움을 이들한테 일깨워주는 것뿐인 것 같다’고 얘기했죠. 야구라는 스포츠가 재미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어요.”

조 코치는 훈련시간을 줄이고 경기시간을 늘렸다.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지루한 훈련보다 그라운드에서 치고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한 눈높이 교육이었다. 일주일에 2번(수요일, 토요일)만 열리던 경기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3일로 늘렸다. 조 코치도 동참했다. 포지션은 감독 겸 심판, 그리고 투수 및 타자였다.

“어느날은 14명이서 게임을 하는데 3팀으로 나눴어요. A팀이 공격하면 B, C팀이 수비하고 B팀이 공격하면 A, C팀이 수비하고.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야구플레이를 떠올리면 안돼요. 중계플레이가 안 되니까 짧은 안타 하나에도 2루, 3루까지 가는 거예요. 저도 안타가 나오면 선수들한테 무조건 달리라고 신나게 팔을 돌렸죠. 선수로도 뛰었어요. 일본인 코치가 포수고 제가 투수였는데 공을 계속 던지고 또 수비 때는 주루코치로서 팔을 돌리고 한 경기 끝나면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더라고요. 하하.”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3이닝을 하는데 무려 2시간이 걸리는 경기에 계속 공을 던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하루 쉬고 또 등판하는 ‘혹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열정을 통해 배우다

이유를 물었다. “아이들을 눈빛을 보면 그렇게 안 할 수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발전도상국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한 번에 뭔가 이루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요. 대신 굉장히 열정적이면서 의욕이 넘치죠. 열정도 순수한 열정?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몽골에서도 야구대회가 있다. 그들만의 작은 리그지만 그래도 선수들은 1등부터 3등까지 주어지는 메달을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뛴다. 우리 돈으로 1000∼2000원 정도의 상금까지 주어지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몽골 환율이 한국과 비슷해서 2000원이 큰 돈이 아니에요. 메달도 좋은 게 아니죠. 내수가 없으니까 유니폼, 방망이, 공 모두 다른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데 메달이 좋을 리가 없죠. 그래도 그걸 받기 위해서 아이들이 이를 악물고 뛰더라고요. 저도 열심히 뛰는 친구들에게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줬습니다.”

조 코치도 3개월간의 짧은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몽골야구협회(MBNF)로부터 ‘메달’을 받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체육훈장과 맞먹는 증표. 그는 가방에서 훈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더니 “사실 낯선 환경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이걸 받으니 그동안 힘들었던 게 다 날아갔다”며 웃었다. 그리고 “지도자라는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흙먼지를 함께 뒤집어쓰며 야구를 함께 즐기던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진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hong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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