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타계] 고마워 잡스! 당신 덕에 지구의 삶이 행복해졌어

입력 2011-10-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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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성공의 아이콘임과 동시에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단순히 애플의 창업자, CEO로서뿐만 아니라 세계 정보통신 시장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IT계의 혁명가였다. 사진은 애플사 웹사이트에 게재된 스티브 잡스의 생전 모습. 사진출처|애플 공식사이트

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성공의 아이콘임과 동시에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단순히 애플의 창업자, CEO로서뿐만 아니라 세계 정보통신 시장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IT계의 혁명가였다. 사진은 애플사 웹사이트에 게재된 스티브 잡스의 생전 모습. 사진출처|애플 공식사이트

■ 잡스, 파란만장했던 인생

입양아로 성장 … 애플 창업 성공가도
경영위기·동료 배신으로 퇴출 시련도
세계 최초 3D 애니 토이스토리로 재기
13년 만에 애플 복귀…1년새 흑자 신화
췌장암 투병중 아이폰·아이패드 IT혁명


‘혁신’의 또 다른 이름 ‘스티브 잡스’가 향년 56세로 영면(永眠)했다.

애플호의 선장으로 전 세계 정보통신(IT) 시장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애플은 5일(현지시간) 성명서를 통해 “애통한 마음으로 스티브 잡스가 오늘 사망했음을 알린다. 스티브는 영명함과 열정, 에너지가 멈추지 않는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풍부해지고 향상됐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고 발표했다. 성공의 아이콘이었던 잡스는 어느 할리우드 영화의 사나리오 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순탄치 않았던 영웅의 인생을 4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1. 출생의 비밀

출생부터 달랐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을 것 같지만, 아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입양아로 자랐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아계 유학생이었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와 미혼모 조앤 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위스콘신 대학원생.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해 폴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시켰다. 당초 양자로 가기로 했던 유복한 집에서 여자 아이를 원해 갈 곳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생모는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집을 원했지만 이들 부부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양모는 고졸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생모는 입양을 거부했다. 양부모가 잡스의 대학입학을 약속하고서야 비로소 입양을 결정했다.

2. 창업 그리고 성공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공부에 별 다른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유독 전자제품에는 호기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장해 1972년 오리건주에 있는 명문 리드대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지만 그것도 잠시, 단 1학기 만에 중퇴했다. 평범한 노동자 양부모가 힘들게 만들어준 대학등록금과 수업료가 전 재산과 다름없다는 것을 안 뒤 대학을 포기했다.

대신 청강생으로 심취한 것은 글자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 타이포그래피였다. 잡스의 이 공부는 훗날 애플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글씨체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잡스가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1976년 컴퓨터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컴퓨터를 창업하면서부터다. IBM으로 대표되는 대형 컴퓨터만 존재하던 시절, ‘애플Ⅱ’라는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를 내놓아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각 개인이 PC를 가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애플Ⅱ로 돈방석에 앉은 그는 한 순간에 성공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3. 배신과 재기

성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잡스도 덩달아 위기를 맞는다.

대기업 IBM이 PC시장에 진출하면서 애플 PC의 돌풍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잡스는 이 때문에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다. 아이러니 한 것은 자신이 직접 영입한 최고경영자 존 스컬리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밀렸다는 점이다. 엄청난 배신이었다.

그러나 잡스의 오뚝이 같은 생명력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컴퓨터그래픽 영화사 픽사를 인수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그는 세계 최초의 3D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전 세계적으로 흥행시키며 또 한번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반대로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 내지 못하던 애플은 급격한 쇄락의 길을 걷는다. 1997년 적자가 18억 달러에 이른 애플 이사회는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경영의 귀재 잡스의 복귀였다.

회사에서 쫓겨난 지 만 13년 만인 1998년 한시적 CEO로 복귀한 그는 불과 1년 만에 애플을 흑자로 돌려세운다.

혁신적 디자인의 아이맥을 앞세운 결과였다.

그리고 2001년, 잡스는 아이폰 광풍의 시발점이 된 아이팟을 내놓는다.

이후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공개하는 제품마다 전 세계적 인기를 모으며 IT업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IT기업들도 애플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4.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전설

거칠 것 없어보였던 잡스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쟁자도 시장도 아닌 병마였다. 2003년 췌장암 선고를 받은 잡스는 이후 투병과 회복, 복귀를 줄곧 반복하면서도 애플을 세계 최정상의 IT기업을 키워나갔다.

2009년 간 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치열하게 투병했지만 병에는 장사가 없었다. 잡스는 올해 3월 아이패드2 프레젠테이션 행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 석상에 나서지 못했다. 8월 팀 쿡에게 바통을 넘기고 물러났다.

그리고 두 달 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CEO 중 한 명인 스티브 잡스는 그를 추종하는 전 세계 IT제품 소비자들을 뒤로 하고 세상과 작별했다. 이제 세상을 바꾼 천재는 전설이 됐다. 아니, 신화가 됐다.

김명근 기자 dionys@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yke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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