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커버스토리]‘나쁜남자’ 신성일이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입력 2012-04-20 09: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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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성일.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 25일 시네마 토크 콘서트 여는 전설의 은막스타
● “애인은 헤어질 수 있어도 아내는 어렵지”
● “장동건과 외모 비교? 팔뚝이 나보다 가늘던데”
● ‘엄 여사가 여전히 화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백발의 청춘’. 머리를 베토벤 스타일로 파마한 ‘전설의 은막스타’ 신성일(75)이 환한 미소로 반겼다.

‘맨발의 청춘’이시니 양말을 벗고 사진을 찍자고 하자, “별걸 다 시킨다”면서도 흔쾌히 양말을 벗어 던졌다. 양말도 벗은 김에 청바지를 입고 찍자며, 차에서 청바지를 가져왔다.

신성일은 1960, 7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 대표작 등을 소개하는 시네마 토크 콘서트 ‘신성일의 프러포즈’를 25일 오후 4시와 8시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연다. 공연을 관장한 중구문화재단 이종덕 사장은 신성일의 오랜 지인이다.

“이번 공연 이름이 프러포즈예요. 처음 제안을 받고 춤을 추면서 기뻐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1960, 70년대 충무로 아이콘

그 시절 영화를 얘기하면서 신성일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최근 출간한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옛 애인이 자신의 아이를 낙태했고 지금도 애인이 있다고 고백하는 바람에 ‘나쁜 남자’의 대명사가 됐지만, 40~50년 전만 해도 신성일은 부정할 수 없는 ‘문화 아이콘’이었다.

1960년 혜성처럼 등장해 영화 541편 출연, 506편 주연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잘생긴 외모로 ‘한국의 알랭 들롱’으로 불렸다. 1964년 11월 서울 워커힐에서 열린 신성일 엄앵란 커플의 결혼식은 초청장이 암거래되고 4000여 하객이 몰려들었다. 영화사 제작부장 사이에선 그를 섭외하기 위해 싸움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인터뷰는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창문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그는 옛일이 떠올랐는지, “저기는 영화사 자리, 여기는 OO 사무실 자리”라며 반가워했다.

“5.16 이후에 박정희 정권이 깡패를 소탕했어요. 그 밑에서 있던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러 충무로에 대거 몰려왔다. 당시만 해도 학력이고 경력이고 묻지 않던 곳이 충무로 영화판이었어. 동대문 건달부터 예술가까지 전부 자유롭게 활동하고 취업할 수 있던 게 이 곳이었지.”

공연 중에는 신성일의 대표작이 상영되고,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 감독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 영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재즈보컬 말로와 인기 가수 알리, 뮤지컬 배우 정상훈과 박은미가 영화주제곡을 편곡해 들려준다. 신성일도 영화 ‘맨발의 청춘’, ‘이별’의 주제가를 부른다고 한다.

“그 시절은 노래 잘하는 선배들은 악극계 출신이거든. 이분들이 영화를 하다가 짬이 나면 술집 무대에 섰어요. 나는 끝까지 노래를 안 배웠어. 내가 노래를 부르면 술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거예요. 나가면 술주정뱅이와 크고 작은 사고 나고 야유 받고, 그거 아니어도 나도 설 무대가 있었고. 이번에는 나를 주제로 하는 무대니까 노래해야지.”

그는 공연을 잘 다듬어서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고 속내를 전하기도 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뉴욕에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살아요. 그중에 괜찮게 살고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 내 또래야. 그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좋은 볼거리가 될 거로 봐요.”



▶ 요즘 한국 영화, 너무 난잡하고 시끄러워

그는 현재 한국 영화계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이런 공연을 하는 이유 중에는 우리 영화의 정통성은 이런 식으로 맥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도 있어요. 지금 영화 하는 사람들에게도 선명한 자극을 줘야 해요. 요즘 영화를 보면 너무 난잡하고 시끄러워서 난 극장에 앉아 한 시간을 못 견뎌요. 해부하듯 참혹하게 사람을 죽이고, 욕지거리가 난무해요. 그런 걸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게 아니거든. 예술의 근본은 아름다움이고, 사랑이에요. 나는 영화인이니까 이 콘서트는 성과가 있을 걸로 봅니다.”

그가 평생을 영화인으로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강신성일로 개명까지 하며 국회의원이 됐지만 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로 진출한 뒤 한나라당 총재특보 지내고,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광고로비 사건과 관련, 2005년 2월 뇌물수수죄로 구속됐다. 징역 5년과 추징금 1억8700만원을 선고받고 2년여를 복역한 뒤 출소했다.

“영화에서 나를 불러주지 않으니까 할 일이 없어서 정치판에 뛰어들었어요. 박 정권 말기 영화에 대한 심의가 완화되려는 찰나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어요. 영화 검열은 그대로 두고 TV를 키웠지. 신성일이 설 자리가 없었어. 스스로 국민당에 찾아가서 강신영이라는 본명으로 마포 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그 이름으론 안되더라고. 영화는 한 10년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 후에 YS 정권 들어와서 영화 제작사 설립 기준을 신고제로 만들었죠. 영화사를 만들었어요. YS와 체육관 같이 다녔는데 ‘니, 정치 한번 해볼래?’라고 해서 대구에 가서 한 번 떨어지고 국회의원 한번 한거야. 나이 63에 국회의원 된 거지.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했을까.”

그는 현재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을 하고 있다. 언론에도 공개했던 경북 영천 한옥(星一家)에서 지내며 매일 밤 9시에 자고 새벽 4시에 깨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짬짬이 아령을 드는 등 운동도 거르지 않는다.

전성기 시절 본인과 미남 스타 장동건 중에 누가 더 잘생겼냐고 묻자, 그는 “장동건 팔뚝이 나보다 가늘던데”라며 자신감을 표했다.

▶ “나쁜 남자라고? 클린턴 부부는 왜 이혼 안하는데?” 그의 반론

대화 도중 그의 단골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충무로 일대를 주름 잡던 그의 단골집은 양념 게장, 어복쟁반이 유명한 한식당이었다. 식당 아주머니들이 “선생님, 더 젊어졌어요”라며 소녀 팬이라도 된 듯 그를 반겼다. 그는 “애인 한 명 사귀어봐, 나처럼 젊어지지”라고 말했다. 그는 식이 조절 중이라며 냉면을 시켰다.

자서전 발표 이후 그가 책에서 연애 대상으로 공개한 고(故) 김영애 아나운서의 과거 사진, 현재 가족까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다. 아내를 두고 외도를 피운 사실을 당당하게 공개하면서 그는 비난을 샀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비판도 많았다.

그 전만 해도 ‘하루에 서른 번씩 아내에게 마사지를 해주고 설거지도 하는, 가정에 충실한, 가장’ 이미지가 컸다. 조강지처가 있는 그가 왜 굳이 여성관계를 먼저 고백해 파문을 일으켰을까.

“톱스타 신성일이 여배우 108명과 영화를 찍었는데 스캔들이 없어요. ‘애인 있습니까?’라고 물어서 ‘없다’고 하면 믿을 사람 어디 있어요? 얼마나 위선이야. 나는 거짓말 못해요.”

자유연애를 할 거면 아내와 갈라서서 떳떳하게 하지, 왜 부인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까.

“그럼 왜 클린턴 부부는 왜 넘어갔나. 그들에겐 왜 잣대를 그렇게 대고 나한테는 이혼하라고 강요하니 참 웃기는 일이야. 우리 부부 이혼 안 해도 각각 다른 집에서 따로 살면서 잘 살아가는 데. 이혼하면 더 편한가? 더 골치 아파지지. 사람들 구미 맞춰가면서 내가 이혼해야겠어요? 신성일은 공인이니까 사생활을 일부 침해당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이상의 압박을 주는 건 나는 수용 못 해요.”

그는 아내와 갈등이 있을 때 분가로 정리했다. 부부는 서울에서도 각기 다른 집에 산다.

“요즘 남자들이 집이 없으니까 나가려고 못 나가는 거야. 한 집안 식구라도 애들하고도 다툼이 있을 수 있어요. 남보다 더 가슴이 아파요. 누군 호텔에 가서 자고 나온다는데, 다시 집에 들어갈 땐 굉장히 처량하다고. 아파트 생활이라는 게 남자들에겐 참 어려워요. 옛날에는 사랑채가 있어서 마당도 있고. 싸움하는 것도 애들 다 보이고…. 남자들이 정년퇴임을 하면 천덕꾸러기가 돼요. 옷 갈아입을 일이 없으니까 ‘파자마 맨’, 거실에 처박혀서 TV 리모컨을 쥐고 있으니 ‘거실의 공포남’이야. 마누라가 밥 안 챙겨주면 못 먹는 놈들이 많아. 세끼 꼬박 챙겨 먹는 ‘삼식이’. 나는 혼자 요리해 먹는데, 그런 남자들 참 딱하다고.”

그는 분가 예찬론을 이어갔다. 한 집에서 매일 싸우며 사는 것보다 따로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다며.

“나하고 우리 마누라는 밥 먹는 거부터 하나도 안 맞아. 그게 나쁜 남자인가. 우리 아이들도 47주년 결혼기념일에 ‘엄마 아빠 참 오래 살았다’라고 그래요. 그래 따로 살잖아.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다른 집에 있잖아. 서울에도 딴 집이고, 영천에도 집 있고. 요즘 전기밥솥 좋지. 빨래 세탁기가 해주지. 재래시장 반찬가게가 얼마나 또 맛있게 해. 이제야 내 친구들이 부럽다고 해요. 마누라 보기 싫어도 어디 나가 있을 곳이 없잖아.”

그래도 충무아트홀 관계자는 엄앵란이 공연장을 찾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공연 도중 부인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모습이 연출되면 좋겠다고 은근슬쩍 떠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건 나하고 안 맞아”였다.

신성일은 2005년 10월 무렵 대구 화원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 아닌가, 엄앵란에게 전해줘’라며 장미 한 송이를 보냈다. 엄앵란은 그 장미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선물 안 줘도 돼. 난 이 장미 한 송이로 일생을 갈 거야. 고마워’라고 했다고.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감옥에서 장미꽃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건 옛날 얘기지, 지금이 아니잖아”라고 한다. ‘엄 여사가 여전히 화나 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자기가 엄앵란과 안 살아 봤잖아”라며 말을 돌렸다. 자서전 파문 이후 엄앵란은 한 인터뷰에서 “죽을 때까지 이혼 안 한다”고 선언했다.

그에게 애인과 아내는 어떤 존재일까. “애인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지만 아내는 어렵지.” 우문현답이었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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