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악으로 깡으로 야구…현역때 몸쪽공 절대 안 피했지”

입력 2012-06-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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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퇴장 1호, 최초의 3연타석 사구(死球)의 주인공인 김인식 충훈고 감독이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김 감독(왼쪽)이 제자의 타격폼을 잡아주고 있다. 안양|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

프로야구 사구의 전설…충훈고 감독

실업시절 부산~서울 구보
김동엽 감독 통해 독기 무장
프로 원년 ‘퇴장 1호’ 기록도

장명부와 3연타석 사구 소동
맞은데 또 맞고나니 눈 뒤집혀
마운드로 달려가 한판 드잡이

하도 맞아 지금도 온몸 욱씬
그래도 프로야구 혜택에 감사
신생 고교팀 지도하며 봉사삶


현역시절 별명은 ‘베트콩’. 까만 얼굴에 조그만 체격이어도 다부지게 야구하는 모습과 맞아떨어진다. 김인식(59). 프로야구 퇴장 1호 선수. 첫 몰수게임의 원인도 만들었다. 최초의 3연타석 사구(死球)의 주인공. 공필성 박종호 이전까지는 사구에 관한 기록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투지의 남자다.


○버스도 직접 운전하는 신생 고교야구팀 감독

안양 석수체육공원을 찾았다. 창단 6년째의 충훈고 야구팀. 덕아웃서 선수들의 훈련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여전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의 영웅 유두열과 함께 제자들을 지도했다. 한동안 옛날 얘기를 나눴다. 아직도 “우리 LG∼”라고 했다. 1982년 MBC 선수로 시작해 2006년 LG 2군 감독을 끝으로 프로생활을 접었다. 보낸 쪽은 기억 못해도 떠난 사람은 여전히 생각나는 모양이다. 훈련 뒤 직접 선수단 버스를 몰았다. 학교에 훈련장이 없어 체육공원 야구장에서 훈련하고, 선수들을 학교 숙소로 이동시켰다. 지원이 풍부하지 않은 신생 고교야구팀 생활. 무보수나 다름없는 감독은 선수들을 위해 늦은 나이에 1종 대형버스 운전면허도 땄다.


○실업야구 바람을 일으킨 롯데 자이언츠의 국토종단 달리기

1976년 실업야구에 새 바람이 불었다. 롯데가 자이언츠를 창단했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 고(故) 김동엽 감독이 초대 사령탑이었다. 대학야구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쓸어 담았다. 성균관대 유격수 김인식도 합류했다. 대우가 좋았다. 은행팀 선수의 월급이 10만원일 때 30만원을 받았다. 매 경기 메리트시스템도 있었다.

롯데는 창단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야구가 아닌 마라톤으로. 실업야구 진출을 앞두고 훈련할 때인 1976년 초. 대학선발팀과 부산에서 연습경기를 했다. 롯데가 졌다. 당시 대학선발 감독은 배성서. 함께 술을 마시던 배 감독이 약을 올리자 김동엽 감독이 화를 내며 외쳤다. “내일 아침부터 구보야.” 다음날 선수들은 설마 했다. 부산에서 울산까지 뛰게 했다. 서울까지 14박15일 동안 대한민국을 종단하는 달리기의 시작이었다. “첫날 오전 9시에 뛰기 시작해 밤 9시에 울산에 도착했다. 1시간 뛰고, 2시간은 걷는 방식이었다. 김 감독은 자전거를 타고 선수들과 함께했다.”

상상초월의 단체훈련은 연일 스포츠뉴스 톱이었다. 서울까지 내달렸다. “마지막 날 안양에서 서울로 넘어올 때는 선수들이 시키지 않아도 날아가듯이 달렸다. 시청에서 롯데제과 공장이 있는 남영동까지 가는데 길가의 팬들이 박수를 치며 우리를 응원했다. 롯데는 인기팀이 됐다. 투수 남우식은 그때 무리한 달리기 후유증으로 선수생활을 더 화려하게 이어가지 못했다.” 롯데의 성공사례를 보고 한국화장품과 포항제철이 야구팀을 창단했다. 실업야구 제2의 중흥기였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롯데는 부산 연고의 프로팀이 됐다. 선수들은 지역 연고로 뿔뿔이 흩어졌다.


○전설의 MBC 청룡, 개성 넘치는 사람들의 집합소

1982년 MBC 유니폼을 입었다. 계약금으로 1400만원을 받았다. A급 대우였다. 그해 계약금과 연봉을 모아 서울 답십리에 29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1년에 80경기를 하는 프로야구. 선수들은 준고속버스 1대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아직은 프로야구가 뭔지 몰랐다. 프로의 실체를 알게 해준 사람은 백인천 초대 감독이었다. “진주에서 훈련을 하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365계단을 토끼뜀, 오리걸음으로 오르게 하고 매일 밤 수천 번의 스윙을 했다. 선수들의 손바닥이 다 까졌다. 얼마나 훈련이 힘들었는지 나중에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모두 볼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MBC는 개성파 선수들이 많았다.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아서 별명이 ‘빨대’였던 고(故) 김용운, 한 모금에 담배를 빨면 재가 필터까지 닿을 정도였다는 송영운, ‘삼봉’이란 별명의 유승안 등이 버스 뒷자리 담화의 주인공이었다. 주전 선수들은 앞자리에서 자기 바빴다. 원정을 처음 경험하는 데다, 이동 스케줄 노하우도 없었다. 야간경기 끝나고 새벽 4시에 숙소에 들어온 뒤 낮경기에 나갔다. 서울서 부산까지 버스로 8시간이 넘게 걸리던 때였다. “모두 힘들었지만 우리도 프로야구를 한다는 기쁨으로 견뎌냈다.”

방송사를 모기업으로 둔 팀답게 스타들도 경기장을 찾았다. 고(故) 서영춘. 매일 동대문구장에 왔다. 소주를 마시며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응원을 했다. 구봉서 배일집 이규혁 등 코미디언들과 선수들은 친하게 지냈다. 지금 유명 정치인의 아내가 된 최명길도 가끔 선수들에게 인사를 했다. 김동엽 감독은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일부러 어필을 했다. “박호성 주심이 마스크를 썼던 때였다. 목발을 하고 있던 감독이 갑자기 나갔다. 이유도 없었다. 방송중계가 있다면서 일부러 목발로 삿대질을 한 뒤 돌아왔다.”

항의할 때 뒷짐 지고 배치기하는 모습으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MBC 청룡 시절 김인식(왼쪽)이 심판을 향해 배치기를 하고 있다. 2006년 LG 2군 감독을 마지막으로 프로생활을 마감했다. 스포츠동아DB



○투지의 김인식, 2개의 에피소드

그에게 따라다니는 사건사고 2가지 중 하나. 1982년 8월 26일 MBC-삼성전에서 몰수게임의 원인을 제공했다. 삼성이 앞선 4회말 공격 때 1루주자 배대웅이 병살을 피하려고 차고 들어왔다. 2루 커버에 들어가다 맞고 쓰러졌다. 국가대표로 친했던 사이. 그라운드를 뒹굴다 배대웅이 오자 벌떡 일어나 장난삼아 머리를 때렸다. 놀란 김동앙 주심이 김인식을 퇴장시켰다. 백인천 감독이 노발대발했다. ‘발로 찬 선수는 퇴장을 안 당하는데 왜 맞은 선수가 퇴장 당하냐’며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결국 몰수게임. 당시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이어가던 김인식의 기록연장 여부는 나중에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유권해석을 통해 이어지는 것으로 정리됐다.

1984년 삼미 장명부에게 이틀에 걸쳐 3번 연속 사구를 맞았다. 5월 15∼16일이었다. “내가 누상에 나가면 도루하고 하니까 평소에 눈여겨봐뒀던 모양이었다. 처음 한 번은 그러려니 했다. 두 번째도 같은 곳을 맞혔다. 화가 나서 인상을 썼다. 그런데 다음날 첫 타석에서 장명부가 또 맞혔다. 악에 받쳐서 쫓아갔는데 동료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만 혼자 장명부 허리춤을 잡았는데 힘이 달려서 엉거주춤 내려왔다. 그 뒤로 친해졌다.”

현역시절 몸쪽 공은 피하지 않았다. 당시 최고 투수 이선희도 자주 몸쪽 공을 던졌다. 많이 맞았다. 악으로 야구를 했던 시절이다. “요즘도 그때 충격으로 아프다”며 웃었다. 이제는 모두 아련한 기억속의 일이다. 그의 마지막 말. “우리는 프로야구의 혜택을 받았다. 그것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 지금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유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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