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현찰 4억 베팅하고 임선동 뺏긴 ‘OB-LG 쩐의 전쟁’

입력 2012-12-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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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80∼90년대 스카우트 전쟁’

서울 라이벌 두팀 ‘고졸 유망주 쟁탈전’ 화끈
92년 임선동 영입작전…결국 연세대행 결말
4년 뒤 LG, 소송 끝에 임선동 붙잡기 성공

선동열 85년 실업팀 숙소이탈 해태와 사인
90년 위재영, 백지수표 거부…인하대 선택


메이저리그에선 신인 스카우트를 ‘달빛 속에서 미인 고르기’라고 한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잘 고른 신인 1명이 구단의 10년 미래를 결정한다. 1982년 탄생한 한국프로야구는 스카우트에 관해 많은 스토리를 남겼다. 특히 아마추어야구와 프로야구가 대결하던 1990년대에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무지막지했던 초창기 해태의 스카우트 전쟁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 실업야구와 스카우트 싸움이 벌어졌다. 한번 프로야구로 가면 아마야구로 돌아올 수 없던 시절이었다. 초창기 선수가 부족했던 해태는 여러 차례 스카우트 룰을 깼다. 선수 15명과 코치 2명으로 시작한 해태였다. 실업팀보다 인원이 적었다. 1982년 세계선수권 출전을 위해 프로행이 유보됐던 김일권은 대표팀 훈련을 무단이탈해 해태와 계약했다. 징계를 받았다. 해태는 여론을 동원했다. 광주시민 1만명의 탄원서를 받아 청와대에 제출했다. 프로원년 도루왕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감정대립이 심해지자 프로와 아마는 협정서를 만들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약을 깨는 선수는 2년간 징계한다는 내용이었지만, 1985년 규정위반 선수가 또 나왔다. 선동열 등 3명이었다. 선동열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3월 16일 한전과의 실업야구 개막전에 등판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3월 25일 한국화장품 숙소에서 나와 해태와 계약했다. 화가 난 대한야구협회는 선동열 민문식(빙그레) 김용수(MBC) 등을 상대로 프로경기 출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자격무효 소송도 걸었다. 이 소송은 프로-아마 양대 기구의 협상으로 나중에 취하됐다. 결국 선동열은 7월 이후, 김용수는 6월 이후 프로선수로 출전했다.


○대학과 프로팀의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1990년부터 프로와 아마의 스카우트 전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고졸선수를 놓고 대학과 프로의 씨름이 벌어졌다. 대졸선수 1차 지명권이 무제한에서 1990년 2명, 1991년 1명으로 축소됐다. 연고지역의 고졸선수에 대한 스카우트에는 제한이 없었다. 고졸선수 스카우트 전쟁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태평양은 1990년 동산고 위재영에게 백지수표를 제시했다. 2학년 때 계약금 3000만원을 주고 공증까지 받았지만, 뒤늦게 인하대로 마음을 굳힌 위재영을 잡지 못했다. 인하대는 위재영을 인하대병원에 위장 입원시켜 태평양과의 접촉을 막은 끝에 지켜냈다.

1993년 LG는 해외에서 기습작전을 벌였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일고교선수권대회 출전을 준비하던 신일고 김재현을 빼돌렸다. 연세대는 그해 또 다른 유망주도 프로에 빼앗겼다. 광주일고 이호준이다. 연세대 김충남 감독은 김재현 사건에 교훈을 얻어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이호준을 연세대 선수단에 합류시켰다. 해태는 프로행 계약서 마감이 지났지만,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이호준을 뒤늦게 만나 입단도장을 받아냈다. 연세대가 물러나는 바람에 유야무야됐지만, 이호준은 이중등록으로 문제가 될 뻔했다.

한양대도 1994년 경북고 이승엽을 놓고 전쟁을 했다. 삼성은 고단수 전법을 썼다. 한양대 진학을 위해선 수학능력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삼성은 이 점을 노렸다. 이승엽은 시험을 봤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200점 만점에 커트라인 40점을 넘지 못했다. 37.5점. 최근 이승엽이 방송에서 털어놓았던 점수다. 삼성의 승리였다.

한양대는 빙그레와의 스카우트 대결에선 2연승을 거뒀다. 대전고 구대성과 공주고 박찬호다. 구대성은 빙그레에서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을 고쳐주는 부속병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스카우트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뒀던 해태에도 실패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뒤 서재응(인하대) 김병현(성균관대) 최희섭(고려대)의 스카우트에 실패했다. 이들은 대학을 전진기지 삼아 메이저리그로 떠나버렸다.


○스카우트 전쟁의 최고 화제는 1992년 임선동

1992년은 한국야구 역사상 기억에 남을 해였다. 최고의 선수들이 고교를 졸업했다. 박찬호 정민철(대전고) 염종석(부산고) 박재홍(광주일고)과 더불어 서울 연고의 임선동(휘문고) 조성민(신일고) 손경수(경기고)였다.

LG와 OB의 스카우트 전쟁은 뜨거웠다. 우선지명을 위한 ‘주사위 던지기’만 잘하면 스카우트팀의 1년은 편하다는 얘기가 나올 때였다. OB가 먼저 손경수를 만났다. 3명의 선수 가운데 안정적으로 1명을 잡아둔 뒤 두 팀의 주사위 던지기에서 조성민이나 임선동 중 1명을 잡겠다는 계산이었다. 서울 봉천동의 어느 다방에서 임선동을 만나 3억원이 든 가방을 건넸지만 거절당했다. 당시 임선동은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3억원만 주면 프로에 가겠다”고 했으나 어머니가 거부했다. LG는 그 소식을 듣고 1억원을 더 얹어 임선동을 접촉했지만, 연세대행을 막지 못했다.

OB는 손경수와 계약금 1억원에 합의를 끝냈다. OB가 안심하던 순간 손경수의 아버지는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사인을 거부했다. 이후 OB 스카우트팀은 LG가 5000만원을 올려 손경수와 계약했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리고 맞이한 1차 지명 주사위 던지기. LG가 모처럼 우선권을 잡았다. 임선동을 찍었다. OB는 고민했다. 조성민을 지명하면 LG가 임선동에 이어 계약을 맺었다는 손경수를 가져가는 상황. 두산은 손경수를 선택했다. LG에게 2명의 유망주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조성민은 서울 구단의 1차 지명을 피해 고려대로 진학했다. 4년 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없었다. 반면 임선동은 연세대 졸업 후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하려고 했으나, 1차 지명권이 걸림돌이 됐다. 임선동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며 송사를 벌였다. 긴 공방 끝에 LG와 합의를 했다. 계약금 7억원을 받고 입단하고, 본인이 원할 경우 다른 팀으로 보내준다는 조건이었다. 조성민은 요미우리에 갔고, 손경수는 OB에서 기대만큼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은퇴했다. 스카우트 파동의 피해자였던 임선동은 LG∼현대를 거쳐 은퇴했다. ‘제2의 선동열’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프로 10년간 성적은 52승36패1세이브, 방어율 4.50에 그쳤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 임선동은 LG에서 받은 계약금으로 재테크를 잘해 은퇴 후 서울 강남에 대형건물을 지었다. 모든 야구인들이 그의 행운을 부러워한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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