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성렬. 스포츠동아DB
선배·동료들 설움 날리는 순간 너무 흥분
쇼트트랙에 가려 빙속 맥 끊길 위기까지
이제 세계적 선수 배출할 저력 생겨 뿌듯
“기태 형님”과의 추억을 떠올릴 때부터 그의 음성은 ‘샤우팅’(Shouting)이었다.
4년 전 밴쿠버에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한국스피드스케이팅은 2014소치동계올림픽에서도 금빛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골인점이 있으면 출발점도 있듯이, 한국빙속의 금빛 레이스는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 시작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초반 처음으로 세계 정상권에 도달한 배기태(49)부터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을 목에 건 제갈성렬(44),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수확한 김윤만(41), 그리고 ‘무관의 제왕’ 이규혁(36·서울시청)에 이르기까지 30년 넘게 힘찬 도전이 이어져왔다. 그 같은 토대가 오늘의 ‘황금세대’를 낳았고, 한국빙속의 성장에 자양분 역할을 해왔다.
제갈성렬 전 대표팀 감독은 4일 “4년 전 (TV) 해설을 하면서 너무도 흥분해 실수를 하기도 했다. 이상화, 모태범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 선배, 동료들이 느꼈던 그 깊은 고독과 외로움, 설움이 모두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고독하고 외로웠을까. 제갈성렬 전 감독은 “20여년 전 (배)기태 형님이 은퇴하면서 ‘성렬아, 고생할 만큼 했다. 너도 이제 쇼트트랙으로 가라. 거기서 메달도 따고 활짝 웃어라’고 하셨다. ‘형님, 저는 스프린터입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피드스케이팅대표팀에서 탈락한 선수들이 새로 생긴 종목 쇼트트랙에서 빛을 발하고 메달을 땄던 시기였다. 너도, 나도 쇼트트랙으로 옮겼고 스피드스케이팅의 맥이 끊길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김윤만이 1992알베르빌동계올림픽 남자 1000m에서 은메달을 딸 당시 한국 취재진은 물론 협회 직원까지 대부분 쇼트트랙경기장에 있었다. 유일하게 홀로 나와 있던 한 방송기자가 일본 NHK의 카메라를 빌려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갈성렬과 김윤만은 스케이트 날을 바꾸지 않았고, 이규혁이 뒤를 이었다. 그들은 왜 묵묵히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감내했을까. 제갈성렬 전 감독은 “오롯이 나의 기록과 싸우는 스포츠다. 빙판처럼 차갑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고 답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스피드스케이팅은 실외스포츠였다. 포근한 실내에서 훈련하고 경기하는 쇼트트랙이 부러웠던 것은 그 온도차보다 더 차이가 났던 인기와 관심도 때문이었다.
추위와 싸워야 했던 훈련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남겼다. 제갈성렬 전 감독은 “해가 질 때와 해가 뜰 때가 가장 춥다. 그 시간에도 항상 훈련을 했다. 한 겨울에는 그 ‘부위’가 얼어서 그런지 소변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많은 선·후배들이 묵묵히 스케이트를 탔다. 국제경기에 나가면 다른 나라 선수들이 ‘한국은 정말 미스터리하다’라는 말을 했다. 제대로 된 훈련장도 부족하고, 선수 숫자도 적은데 덩치 큰 유럽선수들과 대등한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통 있는 종목에서 꼭 1등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모두 똘똘 뭉쳤다”고 밝혔다.
밴쿠버에서 3개의 금메달을 수확하며 춥고 외로웠던 30여년의 도전은 성공했다. 제갈성렬 전 감독에게서 다시 샤우팅이 터졌다. “후배들이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에선 메달을 땄지만 올림픽에선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후배들이 금메달을 딴 것이 내가 우승한 것처럼 기뻤고, 큰 자부심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로움과 싸워 지켜낸 스피드스케이팅이 마침내 올림픽 정상에 섰고, 그 가운데 한명이 나였다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단숨에 인기종목이 되지는 않았다. 기대했던 저변확대도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제갈성렬 전 감독은 “꿈나무들이 피겨스케이팅을 많이 탄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제 이상화가 누구인지, 모태범이 어느 종목 대표선수인지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응원한다.
미래도 밝다. 제갈성렬 전 감독은 “이제 꾸준히 세계 톱10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많은 이들이 묵묵히 헌신하고 노력한 결과다. 올림픽 때마다 꾸준히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종목이 돼서 더 큰 관심과 박수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많은 분들이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린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ushl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