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마틴. 동아닷컴DB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포수 러셀 마틴(31)은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꽤나 친숙한 선수다. 과거 박찬호(41·은퇴)와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기 때문.
캐나다 출신인 마틴은 2006년 5월 LA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2년 뒤인 2008년 총 44경기에서 박찬호의 공을 받았다.
마틴은 지난 주말 애리조나와의 원정경기를 앞두고 만난 동아닷컴 취재진에게 “박찬호는 당시 불펜투수여서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구속이나 볼 끝의 움직임 등은 정말 훌륭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마틴은 2002년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 17라운드에서 다저스에 지명돼 프로에 진출할 당시만 해도 3루수였다. 하지만 루키리그에서 그의 플레이를 지켜본 스카우트의 권유에 따라 포수로 전향했고 4년 뒤인 2006년 포수로 빅리그에 데뷔했다.
‘포지션 변경’에도 불구 각고의 노력 끝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마틴은 이후 다저스의 안방을 차지하며 공격은 물론 수비력까지 인정받아 3차례나 올스타에 선정됐다.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 상도 각 한 번씩 수상했다.
특히 마틴이 2007년에 기록한 시즌 도루 21개는 역대 다저스 포수 중 최다도루 기록으로 이는 1962년 존 로스보로(작고)가 세운 기록(12개)을 45년 만에 경신한 것이다. 마틴은 또 그 해 올스타전에 선발포수로 출전해 캐나다 출신 메이저리거 가운데 최초의 올스타전 선발포수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마틴은 2010년 시즌이 끝난 뒤 다저스와의 재계약 협상 중 연봉에서 이견이 발생해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고 지난해에는 피츠버그로 이적했다. 하지만 그는 이적 첫 해에도 올스타로 선정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친 것은 물론 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실력으로 입증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데뷔 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마틴. 하지만 그에게도 다소 아픈 과거가 있다.
러셀 마틴. 동아닷컴DB
동아닷컴은 국내 언론 최초로 지난 주말 미국 현지에서 마틴을 만나 인터뷰했다. 불우했던 그의 유년시절과 더불어 박찬호와의 추억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음은 마틴과의 일문일답.
-과거 다저스 시절부터 당신의 팬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돼 영광이다.
“(웃으며) 과찬이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줘 고맙다.”
-땀을 많이 흘리고 있다. 개인운동을 하고 왔나?
“그렇다. 잠시 후에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야 하는데 그에 앞서 동료들과 함께 필드에서 축구로 몸을 풀고 왔다.”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나 보다.
“(웃으며) 잘한다고 말하기는 그렇고 할 때 마다 조금씩 느는 것 같다. 하하.”
-메이저리그 데뷔 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비결이 있다면?
“야구선수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장점 중 일부는 타고난 것도 있다. 포수로 전향한 후에는 과거 야구를 시작한 뒤 줄곧 3루수와 내야수로 활약하며 익혔던 빠른 발 놀림과 포구 및 송구동작들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포수의 발 놀림 등은 내야수와 분명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안정된 그리고 인정받는 포수가 되기 위해 지금도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아울러 조나단 루크로이(28·밀워키)와 야디어 몰리나(32·세인트루이스) 같은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연구하고 배우는 과정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발전하는 것은 물론 팀 승리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셀 마틴. 동아닷컴DB
“(웃으며) 배움의 끝이 어디 있겠는가? 매일 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배움의 끝은 우리의 생이 마감될 때 비로소 끝나는 것 아니겠나.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다.”
-포수는 타 포지션에 비해 할 일도 많고 부상 위험도 높다. 후회한 적은 없나?
“물론, 포수는 다른 야수에 비해 할 일이 많다. 야수는 자기 앞에 오는 공만 잘 처리하면 되지만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공 하나마다 집중하고 그에 대처해야 한다. 21세 때 포수로 전향했는데 그땐 배우고 익혀야 할 것 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내 몸에 포수라는 프로그램이 아주 잘 설치돼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지금은 포수라는 포지션이 편하고 익숙하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포수를 필드의 코치 또는 사령관으로 부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령관보다는 조력자 또는 협력자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다.”
-좋은 표현이다. 올 시즌 목표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타율이나 홈런 등 수치상의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 내가 출전하는 매 경기마다 도루저지 등의 수비 또는 안타나 번트 등의 공격력 등을 통해 팀 승리에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표다. 개인적인 기록보다 항상 팀 성적을 우선시 한다.”
-빅리그 통산 1천 안타 달성이 임박했다. 자축할 계획이 있나?
“(웃으며) 통산 1천 안타는 분명 의미 있는 기록이다. 시간과 노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히 이를 자축할 계획은 없다. 세계 최고의 무대로 불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는 것 만으로도 날마다 의미있고 기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보다는 내가 처한 현실에서 날마다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다.”
-야구를 시작한 뒤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나?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 그러니까 빅리그 첫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려서 야구를 시작한 뒤 간절하게 바라던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2006년 5월 5일(현지시간)이었는데 당시 우리 팀이 3-1로 이겼고 내가 타점도 올릴 수 있어 더 기뻤던 것 같다.”
러셀 마틴. 동아닷컴DB
“(웃으며) 한 둘이 아니다.(웃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선수는 팀 린스컴(30·샌프란시스코)이다. 물론 지금은 그의 전성기가 지났지만 과거 내가 다저스에서 뛸 때 린스컴은 96마일의 직구와 파워 체인지업 등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등 실로 대단한 투수였다. 당시 린스컴과의 맞대결 성적이 아마 20타수 2안타 였을 것이다.(웃음)”
-경기나 훈련이 없는 날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런 날은 부족한 수면을 취하거나 드럼을 치면서 음악을 즐기는 등 가급적 야구 생각을 잊고 지낸다. 아울러 좋아하는 스테이크 등의 음식을 먹으며 체력도 보강한다.”
-다저스 시절 박찬호와 총 44경기에서 호흡을 맞췄다.
“그랬다. 당시 박찬호는 불펜투수여서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그의 구속이나 볼 끝의 움직임 등은 정말 훌륭했다. 게다가 박찬호의 허벅지 굵기는 정말이지 엄청 났다.(웃음)”
-박찬호와의 다른 추억도 있는지 궁금하다.
“박찬호는 야구도 잘했지만 유머 감각도 좋았다. 특히 라커룸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동료들에게 다가와 무언가 말하다 말문이 막히면 획 돌아서 가곤 했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박찬호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고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신도 별명이 있나?
“특별한 건 없다. 동료들이 내 몸에 근육이 많다며 ‘머슬(Muscle)’이라고 부른다.”
-당신과 이름이 같은 영화배우 러셀 크로우와 비슷하게 생겨 분명 다른 별명이 있을 것 같다.
“하하. 어떻게 알았나? 팀 동료 중 일부는 나를 영화배우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영화 제목인 ‘글래디에이터(Gladiator)’라고 부른다. 특히 내가 수염을 길러 더 그런 것 같다.”
러셀 마틴. 동아닷컴DB
“그렇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영어로, 어머니와는 프랑스어로 대화하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2개 국어를 익히게 됐다.”
-대단한 행운아다.
“성인이 돼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어서 당신 말처럼 정말이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웃음)”
-과거 야구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 당신의 부친이 지하철 역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맞다. 그랬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음악을 진정 사랑하는 뮤지션이었다. 가장 잘 다루는 악기는 색소폰이었지만 피아노는 물론 플루트와 클라리넷까지 연주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14세가 될 때까지 야구도 가르쳐 주셨는데 어렸을 때 야구클럽에 내야 하는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하철 역에서 색소폰을 연주하셨다. 사람들이 주고 간 돈 중에 동전들은 내가 분류해서 인근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지폐로 바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신에게 ‘아버지’란 의미는 남다르겠다.
“그렇다. 아버지는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위해 헌신했고 특히 내가 방과후 집에 돌아오면 나를 데리고 인근 운동장에 가 야구를 직접 가르쳐 주셨다.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늘 아침 일찍 출근시간에 지하철 역에 가 색소폰을 연주했다. 아울러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음악을 들려 주시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등 마음이 정말 따듯한 분이다.”
-끝으로 한국에 있는 당신 팬들을 위해 한 마디 해달라.
“먼저 그들에게 인사부터 전하고 싶다. (웃으며) 한국에도 팬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국 팬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도 가고 싶고 그들과 함께 한국음식도 먹으며 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 고맙다.”
애리조나=이상희 동아닷컴 객원기자 sang@Lee22.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