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와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감독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 이놈의 설레발 때문에 일을 그르쳤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으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났을 텐데, 알맹이도 없는 얘기를 섣불리 꺼냈다가 기대만 부풀린 꼴이 돼버렸으니까요. 지난주 칼럼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께 먼저 사과를 드려야겠습니다.
협상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연봉과 가족, 두 가지 중에서 저는 후자가 더 주목할 만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고액 연봉에 따른 중과세 문제와 협회의 통 큰 ‘배려’를 기대한 감독의 욕심 때문에 협상이 진행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유럽에 체류하면서 대표팀을 구상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해외파 위주로 구성됐던 지난 월드컵대표팀을 돌아보면 그랬습니다. 현지에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외국인 코치가 따로 고용됐고, 감독 또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유럽에 나가 주요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면담하고 컨디션을 체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준비가 덜 된 선수들을 걸러낼 수 없었고, 결국 그런 선수들은 본선 무대에서 기대했던 것만큼 활약해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유럽에 상주하는 감독이 대표팀을 관리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평가전의 절반 이상이 국내에서 열리는데 소집기간에는 어쩔 수 없이 입국해야 하는 데다,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도 챙겨야 하니까요. 감독이 외국에 있다고 해서 해외파를 편애하는 게 아니고, 한국에 있다고 해서 국내파만 챙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해외파와 국내파의 분리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 이제는 인정하고 극복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두 그룹을 동시에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사령탑을 이원화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일단 9월에 열리는 친선경기들은 신태용 코치 체제로 치른다고 합니다. 누가 지휘봉을 잡든지 간에 국내 지도자가 자국 선수들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외국인 지도자가 해외의 각국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판 마르바이크 감독이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많습니다. 한국축구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걸 모두 쏟아 부을 각오가 되어있는, 헌신적이고도 경험 많은 백전노장이 필요합니다. 대표팀을 재구성하면서 유소년 체제를 재정비하고 국내 지도자를 육성하는 데도 보탬이 될 수 있는, 다재다능하고도 열정적인 축구전문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편 외국인 감독은 가족에 충실하면서도 회사(클럽)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동시에 새로운 국가(대표팀)에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면접을 보는 감독이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협상의 구도가 달라지겠지만, 판 마르바이크 감독이 보여줬던 것처럼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게 요즘의 추세입니다. 앞으로도 강력한 지도자, 훌륭한 교육자, 또는 축구의 선구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모두 가진 후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자격요건을 완화할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놓고 사람을 구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만약 면접관이라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한국축구를 어떻게 바꾸고 싶습니까?”
● 정훈채는?
FIFA.COM 에디터. 2002한일월드컵에서 서울월드컵경기장 관중 안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축구와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UEFA.COM 에디터를 거치며 축구를 종교처럼 생각하고 있다. 2014브라질월드컵에는 월드컵 주관방송사인 HBS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국제축구의 핵심조직 에디터로 활동하며 세계축구의 흐름을 꿰고 있다.
[스포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