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토피아] 서정환 전 감독 “트레이드는 버림받는 게 아니라 성공의 기회”

입력 2015-05-11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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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KBO 경기감독관은 1982년 12월 7일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이는 KBO리그 역대 1호 트레이드다. 서 감독관은 선수로 활약한 삼성과 KIA에서 모두 사령탑까지 경험한 전무후무한 주인공이다. 왼쪽 사진은 서 감독관이 1997년 10월 30일 삼성 사령탑 취임식에서 전수신 전 삼성 사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KIA 사령탑 시절의 모습. 스포츠동아DB

■ 트레이드 1호 서정환 전 감독의 추억

2015시즌 들어 유난히 활발해진 트레이드를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KBO리그 역대 1호 트레이드(1982년 12월 7일 삼성에서 해태로 현금 트레이드)의 주인공 서정환(60) 전 감독이다. 34년간 총 283차례의 트레이드로 597명의 선수가 유니폼을 바꿔 입었지만, 아직까지 그만큼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서 전 감독은 선수로 활약한 두 팀에서 모두 감독까지 경험한 전무후 무한 주인공이다. 지금은 경기감독관으로 있는 그를 만나 30여년의 세월을 건너뛴 옛 기억을 더듬어봤다.


삼성서 ‘땜질 유격수’ 시절 첫 이적
다른 팀 보내달라고 한달간 감독님 졸랐지
삼미와 해태 고민하다가 해태 현금트레이드
선수로 6번·코치로 3번…해태 V9 경험
kt 장성우 등 최근 이적생들 하늘이 준 기회야


● 한 달 이상 서영무 감독을 조른 끝에 기회를 잡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27세. 경리단에서 제대한 뒤 실업팀 포항제철에 복귀해 1년간 놀면서 야구를 한 뒤였다.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해 체육교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26세면 은퇴를 생각할 때였다. 포항제철에서 대충 놀면서 야구를 하다가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삼성으로 갔는데, 1년 동안 놀았던 공백이 컸다”고 밝혔다. 그래도 3월 27일 동대문구장에서 벌어졌던 MBC와의 원년 개막전 선발 유격수였다.

이후 4∼5경기에 선발로 출전한 뒤 후배 오대석에게 주전 자리를 넘겨줬다. 그리고는 ‘땜질’ 유격수로 한 시즌을 보냈다. “오대석이 한창 때였다. 사이클링 안타를 치면서 내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벤치에 있다가 가끔 경기에 나갔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잡아준 계기도 있었다. 1982시즌 후 당시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프로야구선수들은 비시즌에도 바빴다. 삼성 선수들은 지방을 돌며 사인회를 했다. 고(故) 서영무 감독을 졸랐다. 경북고 은사였던 서영무 감독과 우연히 함께 승용차를 탈 기회가 있었다.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서 대구에서 포항까지 가는 동안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서영무 감독은 들어주지 않았다. 서정환의 부친이 경북고 야구부후원회장도 하고, 종친으로 사이가 가까워 유난히 서정환을 아꼈던 서영무 감독이었다.

무려 한 달간 서영무 감독을 만날 때마다 이적시켜달라고 사정했다. 바위 같던 감독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선참들이었다. 경북고 선배 천보성, 배대웅, 손상대 등이 우연히 술집에서 서영무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설득했다. “(서정환이) 1년 동안 놀아서 이제 야구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냥 보내주세요”라고 읍소했다. 그 말에 서영무 감독은 고집을 꺾었다.

서정환을 불렀다. 서영무 감독은 “알았으니 네가 알아서 가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구단이 트레이드의 주체가 아니었다. 원하는 팀을 선수가 수소문해서 찾아가던 때였다. 그야말로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프로야구였다.


● 원년 한국시리즈 때 바람 잡았던 김응룡 감독

서정환이 이적을 결심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1982년 한국시리즈 때였다.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경기 때 대타로 출장준비를 하는데, 야구장을 찾았던 김응룡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동대문구장은 덕아웃 옆에 다음 경기에 출전할 팀이 대기하는 장소가 있었다. 대기타석에서 그 곳이 빤히 보였다. 김 감독은 서정환을 보더니 “야, 거기서 뭐하냐”고 했다. 국가대표팀 때부터 알고 지내던 김 감독의 한마디에는 모든 뜻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 자극받아 시즌 뒤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그 때만 해도 트레이드가 뭔지 몰랐다. 다른 곳에 가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고 했다. 이때 서정환을 탐내던 팀은 또 있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김진영 감독이 오라고 했다. 구단 관계자와 면담도 주선해줬다. 얘기도 잘 됐다. “다음날 삼미 구단 사무실이 있는 종로의 삼일빌딩으로 오라고 했다. 그 곳에서 도장을 찍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때였다.” 아내는 당시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집도 서울 영동시장 부근이었다. 인천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야구의 신은 그를 ‘비 내리는 호남선’을 타라고 했다.

“다음날 삼미로 가기로 결정하고 밤에 집으로 가는데 누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서 선수’라고 누가 나를 불렀다. 자세히 보니 이상국 당시 해태 홍보과장과 남정진 소장이었다. 얘기를 하자고 했다.” 세 사람은 가까운 다방으로 갔다. 광주일고 출신으로 야구를 잘 아는 남 소장이 설득했다. “현재 우리 2루수가 차영화다. 경리단에서 같이 키스톤을 했던 사이 아니냐”며 해태로 오라고 했다. 마침 해태에는 김일권, 신태중 등 경리단 동기이자 친하게 지냈던 선수들이 많았다. 신태중은 자신이 주선해서 결혼까지 이어준 인연도 있었다. 김봉연, 김준환도 경리단과 실업야구 올스타로 함께 야구했던 1년 선배였다.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두 사람은 삼미의 조건을 물은 뒤 “같은 조건으로 해준다”고 약속했다. 당시 해태의 구단 사무실은 여의도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서정환은 종로와 여의도 사이에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결국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현금 트레이드였다. 조건은 1200만원. 요즘 화폐가치로 따져도 상당한 금액의 트레이드머니다. 서 전 감독은 “광주 운암동 아파트 2채를 살 수 있는 돈”이라고 기억했다. “김진영 감독과는 이상하게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중앙대 감독이던 김진영 감독이 오라고 해서 가기로 했다가 막판에 건국대로 갔다. 결국 2번이나 김진영 감독에게는 뒤통수를 친 상황이 됐는데, 그 이후로 김 감독은 아는 체도 안 했다.”


● 성공했던 선택, 트레이드는 하늘이 준 기회!

1983년 해태 유니폼을 입은 뒤 서정환은 선수로서 6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코치로 3번까지 포함해 해태의 V9를 경험했다. 외지인들, 특히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유배지처럼 생각되던 광주에서 대구 사투리로 큰 소리를 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서 전 감독은 “당시 5·18 민주항쟁 후유증으로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입견이 많았지만, 광주에서의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다. 우리야 정치는 모르고 열심히 운동만 했다. 그 곳 사람들도 잘 도와줬다. 따뜻했다. 해태 선수라서 더욱 잘 대해줬는지도 모르겠다. 되돌아보면 해태는 정말 괜찮은 팀이었는데”라고 추억했다.

“광주에서 가장 성공한 대구 출신일 것”이라는 서 전 감독은 ‘최근 벌어진 트레이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묻자 “기회”라는 말을 했다. 그는 “야구는 어디서 하나 똑같다. 지금은 어디를 가건 야구만 잘하면 팬들이 사랑해준다. 팀을 가리지 않고 선수를 좋아하는 팬이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고 부럽다. 프랜차이즈에서 오래 야구 잘하면 좋겠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트레이드는 버림 받은 것이 아니다. 경기를 뛸 기회를 잡은 사람에게만 기량이 늘 기회가 온다. 지금 kt 장성우를 비롯해 유니폼을 바꿔 입은 선수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다. 어디건 주전으로 자리 잡고 야구를 잘하면 성공의 기회는 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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