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서 처음 맞닥뜨린 거대한 바위 앞에서
야구인생 지렛대가 돼 준 김감독의 한마디
그 때부터 밥 먹는 것만큼 지독하게 야구
필살기 체인지업 장착 최정상 불펜투수로
정우람 “지금도 밥만 보면 그 때가 생각나”
“밥은 왜 먹냐?”
2007년 8월말, 아침밥을 먹던 스물두 살 정우람(30·SK)에게 느닷없이 날아든 질문이었다. 야구선수 이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밥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밥을 왜 먹느냐”니. 이는 당시 SK 사령탑을 맡았던 김성근 한화 감독(73)이 아침식사를 하려고 호텔 식당에 내려온 정우람을 불러 앉힌 뒤 불쑥 내던진 화두였다.
김 감독 : “우람아, 밥은 왜 먹냐?”
정우람 : “?…”
김 감독 : “밥은 왜 먹냐고?”
정우람 : “살기 위해 먹는데요.”
한편으로 보면 원초적인 물음이고, 한편으로 보면 철학적인 우문(愚問)이다. 그런데 “살기 위해 먹는다”는 현답(賢答)이 튀어나왔다.
김 감독 : “그래,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 그런데 살기 위해 야구도 하는 거야.”
정우람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던 정우람도 그제야 대충 느낌이 왔다. 김 감독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짧고 굵게 사는 것도 있고,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있다. 그러나 ‘짧고 굵게 살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은 사람은 오래 살지만, ‘가늘고 길게 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대부분 짧게 산다. 야구도 ‘대충 어떻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내일 바로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 같은 좌완인데 김경태는 1군에 있고, 너는 2군에 있다. 구속은 너보다 떨어지지만 스트라이크를 던지니까 김경태는 1군에 있는 거야. 컨트롤이 안 되면 컨트롤을 잡기 위해, 변화구가 없으면 변화구를 연마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밥은 왜 먹는가’라는 화두로 시작된 밥상머리 교육은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고 답했던 정우람은 정작 밥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밥 대신 배불리 먹었던 꾸중. 8년 전, SK 담당으로 이런 내용의 기사를 썼던 기자에게 정우람은 “당시 상황이 지금도 기억난다”며 웃었다.
“꾸중이라기보다는 훈계였죠. 어릴 때였는데, 그날 많은 것을 생각했어요. 200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도 빠지면서 그해 겨울부터 정말 독하게 야구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밥 먹는 것 이상으로 절실하게. 지금도 밥을 보면 문득문득 그때가 생각나요. 그럴 때마다 저를 돌아보곤 하죠.”
2004년 프로 데뷔 이후 한 뼘씩 성장하며 직진하던 정우람은 2007년 갑자기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만나 정지를 했다. 당시 원포인트 릴리프로 살아가던 그가 장착하고 있던 레퍼토리는 직구 아니면 슬라이더였다. 그것만으로도 2006년 82경기(46.2이닝)나 나갔을 만큼 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타자들에게 공이 맞아나가기 시작했다. 구종도 단순했거니와 좋았던 컨트롤마저 흔들렸던 탓이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2군을 들락거리는 일도 잦았다. “밥은 왜 먹느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만났을 당시, 그는 엔트리에 빠진 채 1군 선수단과 동행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살기 위해’ 밥을 먹듯, ‘살기 위해’ 야구에 매달렸다. 지금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체인지업도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연마한 덕에 얻은 생존의 필살기다. 할머니가 ‘우람하게 자라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처럼, 그는 이제 SK 불펜의 대들보이자 대한민국 최정상의 셋업맨으로 우람하게 자랐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밥을 왜 먹냐”는 화두를 던졌던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김 감독은 “글쎄, 내가 (정)우람이한테 그런 적이 있었나”라며 웃었다.
무심코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때로는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다. 거창한 말도 아니다. “밥은 왜 먹는가”라는 삶의 근원적 질문 하나는 정우람에게 잠들어 있던 ‘도전 DNA’를 일깨웠다. 그 한마디는 야구인생에서 맞닥뜨렸던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들어 올려준 고마운 지렛대가 됐다.
잘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지렛대가 되어준 한마디쯤은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거창하진 않을지라도.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