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연맹
9년 전 현대캐피탈 챔피언 만든 20분 소동
전세 뒤집은 모로즈·고희진의 세리머니도
2012런던올림픽에서 한국여자배구를 4강에 올려놓았던 김형실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장은 “배구는 흐름의 경기이고, 여자배구는 특히 심리전이다”고 말했다. 당시 여자대표팀이 런던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4강까지 오른 것 역시 대한배구협회의 열악한 지원에 분노가 쌓였던 선수들끼리 더욱 똘똘 뭉쳤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득점경쟁을 펼치는 배구는 선수들끼리 신체접촉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미묘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 등장한다.
● 물 들어올 때 노 젓지 못하면 배는 뒤집어진다!
여자부 5라운드에서 플레이오프 경쟁자 흥국생명과 도로공사를 꺾고 승점 6을 챙긴 GS칼텍스 이선구 감독은 올 시즌 3차례의 경기가 두고두고 아쉽다. 팀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흐름을 타지 못하고 상대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1라운드 현대건설, 4라운드 흥국생명∼KGC인삼공사와의 경기 승패가 뒤바뀌었으면 시즌 전체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지난해 10월 15일 장충체육관에서 홈 개막전으로 치러진 현대건설전이 두고두고 아쉽다. 시즌 첫 경기에서 IBK기업은행을 3-0으로 완파하고 기세를 탄 GS칼텍스는 현대건설을 상대로 먼저 두 세트를 쉽게 따냈다. 20점도 내주지 않은 일방적 경기였다. 파죽지세였지만, 3세트부터 경기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2세트 후 홈 개막전을 기념해 펼쳐진 가수의 특별공연이 문제였다. 그 공연은 잘 유지해오던 GS칼텍스 선수들의 집중력에 훼방을 놓았다. 결국 2-3으로 허망하게 역전패했다. 4라운드 흥국생명, 인삼공사와의 경기는 이겼으면 연승을 달릴 찬스였지만 패배로 흐름이 끊겼다.
이 감독은 중동에서의 경험담도 들려줬다. 중동은 하루에 5차례 정해진 시간마다 5분 내외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있다. 경기 도중이라도 기도를 위한 음악이 나오면 모든 것을 중단해야 한다. 선수도, 관중도 기도를 올려야 하는데 이 기도시간을 전후로 앞서던 경기가 자주 뒤집어진다고 했다.
● V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경기의 흐름이 바뀐 경기는?
2006∼2007시즌 남자부 플레이오프(PO) 2차전은 큰 경기에서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정규리그 2위로 PO에 진출한 현대캐피탈은 3위 대한항공과 챔피언 결전전 티켓을 놓고 격돌했다. 1차전을 3-1로 이긴 현대캐피탈은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열린 2차전 때 고전했다.
대한항공이 먼저 첫 세트를 따냈고, 2번째 세트도 13-9로 앞섰다. 이때 사단이 났다. 현대캐피탈 루니의 공격 때 터치아웃 여부를 놓고 4심 합의가 벌어졌다. 협의를 이끌어낸 주심이 처음에는 현대캐피탈의 득점을 선언했다가 이내 수신호가 잘못됐다며 대한항공의 득점을 선언했다. 판정이 번복되자 당시 현대캐피탈 김호철 감독은 흥분했다. 선수들을 코트 밖으로 철수시키며 20분간 항의를 지속했다. 이 사태는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변곡점이 됐다. 2세트도 25-19로 쉽게 따낸 대한항공은 3세트 듀스 공방 끝에 31-33으로 지더니, 내리 두 세트를 더 내주고 말았다.
악전고투 끝에 챔프전에 나간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마저 꺾고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V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스토리를 만든 20분의 경기중단이었다. 배구인들은 사이드아웃제도 시절 14-1, 14-2로 앞서고도 서브권을 가진 팀이 한 점을 더 올리지 못해 역전패한 경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만큼 배구에선 흐름이 무섭다.
● 모로즈의 세리머니와 시몬의 어필
올 시즌 대한항공의 대체 외국인선수 모로즈는 어떤 선수보다 득점 후 액션이 크다. 동료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는 최고겠지만, 상대팀에선 기분이 나쁘다. 16일 OK저축은행-대한항공전 때 시몬은 모로즈의 세리머니를 놓고 심판에게 어필했다. “세리머니 때는 상대 코트를 보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모로즈가 이것을 자주 어긴다”고 주장했다. 주심은 결국 모로즈를 불러 주의를 줬지만 경기는 대한항공이 이겼다. 그날 모로즈는 상대팀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면서 경기의 흐름을 유리하게 이끌어오는 심리전을 잘 펼쳤다.
준PO 티켓을 따기 위해 총력체제에 들어간 삼성화재는 고희진의 가세로 큰 힘을 얻을 것 같다. 지난해 10월 27일 우리카드와의 1라운드 경기 때 발목 부상을 입었던 베테랑은 힘든 재활을 마치고 곧 경기에 출전한다. 고희진은 속공과 블로킹에서의 역할도 좋지만, 상대팀과의 신경전 때 더 필요한 선수다. 중요한 순간, 맨투맨 블로킹으로 상대를 잡아낸 뒤 고릴라 세리머니를 펼치면 상대팀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진다. 이런 선수만 있으면 감독이 흐름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