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사람들] 100년째…그리고 아직도, 편견과 싸우는 소록도

입력 2016-05-31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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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소록도 전경. 오른쪽 소록대교가 소록도와 섬 바깥을 이어주고 있다. 왼쪽의 녹동항과는 손닿을 듯 가깝기만 하다. 섬과 그 안의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은 여전히 그렇게 가까운 듯 멀기만 하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전남 고흥군 소록도 전경. 오른쪽 소록대교가 소록도와 섬 바깥을 이어주고 있다. 왼쪽의 녹동항과는 손닿을 듯 가깝기만 하다. 섬과 그 안의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은 여전히 그렇게 가까운 듯 멀기만 하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4. 남겨진 이야기

누구는 ‘천형의 땅’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아픔의 섬’이라고 말한다. 천형처럼 내려앉은 아픔과 설움의 흔적이 여전하기 때문일까.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마치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아”(小鹿島, ‘소록도 80년사’·국립소록도병원 펴냄) 붙여진 이름은 그러나 한센병과 그 후유증 혹은 합병증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문둥병’이란 이름의 소외와 차별, 멸시의 아픔을 감당해낸 섬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듯하다. 1916년 일제가 나환자 격리 정책에 따라 이 곳에 자혜의원을 세운 지 100년. 소록도엔 여전히 그 오랜 세월이 남긴 상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섬 사람들의 남은 이야기를 전한다.

2011년 국가상대 소송 대법 계류중
다음달 20일 소록도 특별재판 관심
6년전 ‘오마도 사건 인권 침해’ 규정
온당한 보상 여부는 아직도 불투명

장경희(78·가명) 할머니는 독실한 ‘장로교’ 신자다. 종교는 그가 섬에 들어온 뒤 치료를 받는 동안 힘겹게 한 세상살이를 그나마 견디게 해줬다.

그는 특별한 통장을 하나 갖고 있다. ‘통일통장’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전도를 하겠다”는 의지로 2009년부터 꼬박꼬박 돈을 모아왔다. ‘통일통장’의 쓰임새까지 정해 놓았다.

“모은 돈의 3분의 1은 선물을 살겨. 3분의 1은 또 성경을 사고, 나머지는 헌금하는 거지.”

2014년 불편한 몸으로 중국 땅을 통해 백두산 천지를 보고 오기도 한 그는 이미 그 꿈의 일부를 실행해왔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과 모은 돈으로 2003년 필리핀에 교회를 세웠다.

“1700만원이 들었지. 마늘 심어 모은 돈이여.”

모든 주민들이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인 소록도에선 장 할머니처럼 해외 교회를 짓는 데 도움을 준 이들이 심심찮다.

이처럼 섬사람들은 섬 바깥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대화는 때로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곤 한다.

소통을 꿈꾼다

“여기, 문둥이들은 다 어디 갔어요?”

섬사람 김상범(70·가명)씨의 말이다. 소록도는 국립소록도병원을 경계로 그 바깥은 이미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섬 특유의 자연풍광에 많은 관광객이 이 곳을 찾고 있다.

하지만 섬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여전히 외부 사람이 쉽게 찾아갈 수 없다. 병의 전염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 아니다. 현재 550여 섬사람들 가운데 양성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음성환자들이거나 완치한 상황에서 이 곳을 터전 삼아 살고 있는 이들이다.

섬사람들과 섬 밖의 사람들이 쉽게 소통할 수 없는 까닭, 그것 역시 섬 바깥 사람들의 지독한 편견 탓이다. 희미한 분홍빛 얼굴을 빼고는 불운한 병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김씨는 “가끔 육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긴 허는디, 일부 사람들이 그랍디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보고 문둥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주민은 그 같은 책임을 언론에 묻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언론이 만들어낸 결과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여기 말고도 전국에 120여개의 한센인 정착촌이 있다. 정착촌이 만들어지면서 처음에는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컸고 아이들까지도 교육 문제 등 여러 가지 아픔을 겪었지만, 이제는 아니다”면서 “하지만 소록도만큼은 100년째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편견 속에서도 매년 4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섬을 찾는다. 이들은 거동이 불편한 섬사람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섬사람들과 섬 바깥 사람들을 마음으로 연결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가교일지 모른다.

여전히 남은 피해 보상

장경희 할머니는 “아들딸도 없고 뭔가 하나 남겨야겠는데” 하는 생각에서 해외에 교회를 짓는 데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그처럼 섬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에겐 자녀가 없다. 전염에 대한 편견과 우려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강제 단종 및 낙태가 자행된 까닭이다.

“결혼을 하거나 동거를 하고 싶으면 정관수술을 받았다. 1960년대에는 임신하면 강제 퇴원시키기도 했고.”

장 할머니는 “만일 임신이라도 하면 병원에 보고를 해야 혔어. 보고를 안혀도 병원 측에서 여자들을 죄다 불러놓고 눈치껏 잡아냈다”면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다.

그렇게 당한 피해에 대해 섬사람들을 포함한 500여명은 201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2007년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진 뒤였다. 이에 법원은 “한센인의 본질적 욕구와 천부적 권리를 침해했다”며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정부가 이에 불복하면서 관련 소송은 현재 대법원 등에 계류 중이다. 다음달 20일에는 139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30부(강영수 부장판사)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특별 기일을 열 예정이기도 하다. 이날 재판에서 재판부는 섬사람들의 아픔을 듣고 수술대와 감금실, 화장터 등 그 흔적을 좇을 예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제강점기 피해에 대해서는 최근 일본 정부가 보상키로 했다는 점일까. 일본 정부는 2006년 3월 한국 한센인 2명에 대한 보상을 결정한 이후 지난달까지 10년 동안 한국인 피해자 590명에 대한 보상을 마무리했다.


● 오마도, 또 다른 아픔

여기, 또 하나 여전히 보듬어지지 않고 있는, 아니 꼭 보듬어야 하는 아픔도 있다. 오마도 간척사업이다. 아니 정확히는 오마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섬사람들에 대한 보상 문제이다. 국립소록도병원 조창원 원장의 주도로 1962년부터 바다를 메워 9백91만7300여m²(300만평)의 땅을 일궈 섬사람들을 정착시키겠다고 나선 사업은 그러나 몇 년 가지 못해 사업의 주체가 전라남도로 이관됐다. 섬 바깥 육지 사람들의 반대를 표로만 계산한 약삭빠른 정치의 탓이었다. 오로지 삽과 곡괭이 그리고 흙을 퍼나르는 토차 등에만 의존한 채 거의 맨손과 맨발로 땅을 만들어낸 섬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최금주(77)씨는 “어떤 길을 가더라도 죽기 전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흙을 퍼내고 맨몸으로 바위를 나른 이들의 대부분은 섬의 납골당인 만령당에 잠들어 있다.

섬을 나와 육지에서 자신들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걸고 뛰어든 간척사업에서 이들이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미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섬사람들의 인권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규정했지만 그 온당한 보상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2월23일자부터 격주로 연재 중인 ‘고흥군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은 5월 한 달 동안 ‘소록도, 사람들’ 4회 연재로 대체합니다. ‘고흥군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은 6월14일자부터 격주로 이어집니다.

소록도(고흥)|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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