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세 가지 색’ 3부작을 연출한 폴란드 출신의 전설적인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주인공 베로니카와 베로니끄, 1인 2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이렌느 야곱이 화제다. 루이 말 감독의 ‘굿바이 칠드런’에서 단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데뷔한 이렌느 야곱은, 우연한 기회에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눈에 띄어 첫 번째 주연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타이틀 롤을 얻게 된다.
키에슬로브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애초에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주인공으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케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고, 그 다음으로 염두에 두었던 배우이자 ‘세 가지 색 : 블루’의 주인공인 줄리엣 비노쉬 역시 ‘퐁네프의 연인들’ 촬영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때 감독의 눈에 띈 것이 영화 출연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스물 다섯살의 배우 이렌느 야곱이었다. 촬영에 들어가자 키에슬로브스키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지닌 이 영화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명민한 배우였다.
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분신과도 같은 두 여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그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적인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들은 모두 재능과 열정을 지녔지만 삶에서 뭔가 빠진 게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느끼는 공허함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신비로운 외모와 지적인 분위기 그리고 선과 미가 일체를 이룬 순수한 광채를 발산하며 섬세한 연기력을 선보인 이렌느 야곱은 평단과 관객 모두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키에슬로브스키는 ‘세 가지 색’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세 가지 색 : 레드’에서 이렌느 야곱을 다시 캐스팅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연상시키는 순수하고 신비로운 매력에 깊이있는 연기를 선보인 그녀는 이 작품으로 명실상부 키에슬로브스키의 뮤즈로 자리매김했다. 키에슬로브스키의 죽음 이후에도 이렌느 야곱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빔 벤더스 감독의 합작 영화 ‘구름 저편에’를 비롯해 할리우드에도 진출,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키에슬로브스키와 함께 한 두 편의 영화만큼 그녀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영화는 없었다.
‘도플갱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아름답고 시적인 영상미, 신비로운 음악의 조화로 지금 봐도 감각적인 아트필름의 진수를 보여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거장다운 연출이 돋보이는 키에슬로브스키의 가장 유혹적인 걸작으로 오는 6월 23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