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수경(51)은 많은 위기 속에서도 후자를 택했다. 신인 때는 수많은 오디션에서 낙방했다. 준비하고 있던 작품에서 도중 하차를 겪기도 했다. 갑상선 암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전수경은 모든 위기를 극복했다. 다시 무대에 올라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그 길을 30년째 걷고 있는 지금, 그는 뮤지컬 계의 1세대 배우로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또한 무대뿐 아니라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뮤지컬 ‘오! 캐롤’을 마쳤고 tvN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왕방울’ 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 그를 성수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공연과 드라마 촬영으로 피곤할 법도 하지만 전수경은 웃으며 “예전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는다. ‘시카고 타자기’가 어른들의 분량은 많은 편은 아니라 스케줄 조정을 잘 하면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수경이 참여했던 뮤지컬 ‘오! 캐롤’은 지난해 초연을 시작해 올해 다시 앙코르 공연을 올렸다. 닐 세다카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오! 캐롤’은 미국 초연 이후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서 공연될 만큼 흥행한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시카고’, ‘맘마미아’ 등 많은 앙코르 공연 경험이 있는 그는 “내가 출연한 작품이 앙코르 공연 없이 마무리 되면 괜히 속상하다”며 “‘오! 캐롤’은 많은 분들께서 사랑해주신 덕분에 앙코르 공연을 할 수 있게 됐다. 참 감사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젊은이들의 사랑부터 중년의 사랑까지 다 담겨 있는 극이어서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 공연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젊었을 때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했고, 연기를 못 하면 못 살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 덕분에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가는 것, 더 경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내려놓는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지금은 가정,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앞서 말했듯, 전수경은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럼에도 집처럼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은 무대다. 무대에 오를 때 전수경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가 느낀 무대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각본과 연출도 중요하지만 무대에서는 배우가 클로즈업과 풀샷을 조절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도 배우의 연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죠. 물론 이런 것들이 부담이 되기도 해요. 작품이 실패하면 그건 그건 배우의 탓이기도 하거든요. 책임감이 커지는 곳이죠.”
전수경은 무엇보다 관객들과의 호흡이 가장 짜릿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에너지를 쌍방향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큰 매력을 지닌 곳”이라고 말했다.
“관객들과 호흡하는 무대는 어쩌면 마약 같은 공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지도 몰라요.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로 무대에 오를 때가 있어요. 몸살이 나거나 장염에 걸리면 정말 죽고 싶죠. 그런데도 조명이 있는 무대에 서면 다 잊게 돼요. 가장 강력한 진통제예요. 아파 죽을 것 같다가도 저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하하.”
그렇게 무대에 서게 된지 어느덧 30년이 됐다. 1988년 제12회 MBC ‘대학가요제’로 처음 TV에 얼굴을 내비친 전수경은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딱히 감회가 새롭다거나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진 못했다. 그는 “선배들과 무대에 오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됐다니 믿기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하자는 생각으로 살다보니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일이 있었어요. 방황, 시련의 시기도 있었고 스스로 (실력이)부족하다는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추억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특히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요. 예전에는 뮤지컬이 대중적이지 않았잖아요.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벌이는 지금보다 훨씬 못하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한 생활을 했죠. 앞으로도 지금까지 함께했던 사람들과 오랫동안 무대에 서고 싶어요.”
수많은 시련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갑상선 암 수술 후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였다”고 대답했다. 그는 “수술 전에는 피로도가 강했고, 후에는 목에 부담이 와 스트레스까지 더해졌다. 그럼에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힘든 시간을 넘긴 뒤에는 무대에 오른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실 제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 ‘벨’ 역의 한국어 더빙을 맡았어요. 덕분에 평생 해보지 못한 공주 역할을 해봤죠. (웃음) 그런데 최근에 딸들과 영화 ‘미녀와 야수’를 봤는데 ‘내가 저 노래를 불렀던 시절이 언제지’ 했어요. 그 때는 참 쉽게 불렀던 노래들인데 지금은 음정 하나 하나를 다 만들어 불러야 하니 아쉽고 힘들어요. 배우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얻은 것도 있어요. 약해지면서 배운 삶의 지혜, 일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얻은 것 같아요.”
배우를 ‘소모품’이라로고 표현한 그는 “소모되지 않고 빛을 발할 수 있게 하는 건 배우의 몫”이라며 “사람들이 ‘배우’라는 도구를 찾도록 늘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듯이 상품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관객들은 냉정하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 된다. 관객들이 이제 쉬어야 한다고 판단하면 그땐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게 그 시기가 오면 정말 슬플 것 같다”고 말했다.
“가끔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지만, 아직까지 저를 찾는 제작자와 팬들, 그리고 함께 연기하는 동료들이 있어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30년 동안 잘 해온 것들을 끝까지 잘 하고 싶어요.”
→ 베테랑 토크 ②로 이어집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