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올마이티 히트! 진기명기 사이클링히트의 세계

입력 2017-06-09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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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정진호가 7일 잠실 삼성전에서 깜짝 사이클링히트를 해냈다. KBO 역사상 사이클링히트는 23번 있었지만 5회가 끝나기 전에 이 기록을 완성한 최초의 선수는 정진호였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1988년 10월25일.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강기웅은 제일은행전에서 안타와 2루타, 홈런을 차례로 쳤다. 스코어는 이미 크게 벌어져 승부는 기울어진 상황. 사이클링히트에 3루타가 부족했다. 마지막 타석. 그런데 하필이면 타구가 의도하지 않게 외야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야구를 한 뒤로 가장 달갑지 않은 홈런. 그 순간 강기웅은 꾀(?)가 떠올랐다. 1루, 2루, 3루를 차례로 밟은 그는 마치 ‘모두들 여기 보시오’라고 외치 듯 너무나도 확실히(?) 홈플레이트를 밟지 않고 덕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壘)의 공과(空過)’. 베이스를 밟지 않고 지나가게 되면 그 베이스의 점유권을 잃어버리게 되는 야구규칙을 활용한 작전(?)이었다. 홈에서 아웃이 선언되고, 기록상으로 3루타가 돼야 정상. 그러나 심판은 꿈쩍도 하지 않고 홈런으로 선언해버렸다. 야구규칙에 ‘누의 공과’는 수비측의 어필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 있던 제일은행측에서 어필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사이클링히트와 관련해 야구계에 구전되는 전설이다. 거꾸로 따져보면 그만큼 사이클링히트는 타자라면 누구나 선수생활에서 한번쯤은 달성해 보고 싶은 로망이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프로야구에서도 이만수, 김성한, 장종훈, 이종범, 이승엽 등 역대급 타자들도 평생 달성하지 못했다. 그 어려운 것을 두산 정진호가 7일 잠실 삼성전에서 해냈다. KBO리그 역대 23호. 그것도 역대 최소이닝인 5이닝 만에 달성하는 새 역사를 썼다.

선수 시절 강기웅.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올마이티 히트! 최초의 사나이 오대석의 추억

사이클링히트(cycling hit)는 한 타자가 한 경기에서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순서와 상관없이 모두 쳐 내는 것을 일컫는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히트 포 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 혹은 ‘히팅 포 더 사이클(hitting for the cycle)이라고 하는데, 용어가 너무 길어 한국에서는 그냥 ‘사이클링히트’로 부르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올마이티 히트(almighty hit)’라고도 한다. ‘전능한(almighty)’ 안타라는 의미다.

역대 최초의 사이클링히트 주인공은 삼성 오대석(전 한화 코치). 1982년 6월12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린 삼미전에서 3번타자로 나서 1회초 3루타, 3회초 2루타, 5회초 안타를 친 뒤 6회초에 중월 2점홈런으로 기록을 완성했다. 오 전 코치는 아직도 그날 일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실 그날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지만, 그런 기록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당시 6회에 홈런을 치고 덕아웃에 들어갔더니 문용운 선생님(덕아웃 기록원)이 사이클링히트라는 것을 알려줬어요. 승부가 이미 기울어서(삼성 14-1 리드) 홈런 후에 서영무 감독님이 교체를 해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경기 후에 부산의 호텔에 가서 파티를 했어요. 감독님이 먼저 건배도 제의하고, 이종남 기자를 비롯해 베테랑 야구기자들도 몰려와서 최초 기록이라고 축하도 해주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이게 기록이구나’ 실감을 했습니다.”

오 전 코치의 회상이다. 8일 전화통화에서 그는 “어제(7일) 두산 정진호가 사이클링히트를 치니까 또 내 이름이 나오더라고요. 프로야구 선수로 별다른 큰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최초의 사이클링히트 주인공이라고 기록이 달성될 때마다 거론되니까 기분은 좋습니다”라며 웃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대구가 연고지인 삼성과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의 경기인데 왜 롯데 홈인 부산 구덕구장에서 야구를 했을까. 오 전 코치는 “당시 인천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가 그 즈음 다른 구장을 돌아다니며 홈경기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 대기록보다는 진기록! 사이클링히트 들여다보니

사실 사이클링히트는 ‘대기록’보다는 ‘진기록’에 가깝다. 선수가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점지해줘야만 가능한 타이틀. 그래서 자주 볼 수 없다. KBO리그에서도 올해까지 36년간 23차례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보다 팀수(30)와 경기수(162경기)가 훨씬 많고, 14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 역시 마찬가지다. 1882년 커리 폴리가 기록한 이후 올 시즌 4월30일 카를로스 고메스(텍사스)까지 총 310차례 달성됐다. 노히트노런이 288회 나왔으니 ‘히트 포 더 사이클’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진기록 중의 진기록으로 평가받는다.

KBO리그에서는 오대석 이후 5년이나 지나서야 2호(빙그레 이강돈)가 나왔을 정도로, 초창기에는 사이클링히트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처럼 여겨졌다. 그런 면에서 요즘은 사이클링히트 풍년 시대라 할 만하다. 2013년 이후 매년 나오고 있고, 최근 5년 사이에만 벌써 9차례나 달성됐기 때문이다.

KBO리그 이정표가 된 기록들만 살펴봐도 흥미롭다. 서용빈(LG)은 입단 첫 해인 1994년 신인 사상 최초의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고, 2001년 매니 마르티네스(삼성)는 외국인선수 최초의 주인공이 됐다. 양준혁은 삼성 시절이던 1996년과 2003년 사상 최초로 2차례 사이클링히트를 완성했다. 둘 다 현대전이었다. 이어 2015년 NC 테임즈는 최초로 한 시즌에 2차례나 기록을 수립하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현재 MBC스포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양준혁은 “사이클링히트는 날고 긴 천하의 이종범도 달성하지 못했던 기록 아니냐. 선수가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도 따라야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그래서 두 차례나 달성한 나로선 기분 좋은 기록임에 틀림없다”며 웃었다.

사이클링히트는 순서대로 치지 않아도 기록이 완성되지만, 단타-2루타-3루타-홈런 순으로 치면 ‘내추럴 사이클(natural cycle)’이라고 부른다. 14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역대 14차례밖에 나오지 않은 진기록 중의 진기록. SK에서 활약했던 루크 스캇이 2006년 휴스턴 시절에 달성한 바 있다. KBO리그에서는 딱 1명이 있는데, ‘호랑나비’ 롯데 김응국이 1996년 4월14일 사직 한화전에서 우전안타-우월2루타-중월3루타-좌월홈런 순으로 때려내는 행운을 안았다.

신인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 주인공 서용빈. 사진제공|LG 트윈스



● 최연소, 최고령, 그리고…

역대 최연소 사이클링히트는 신종길(현 KIA)이 한화 시절이던 2004년 기록한 20세8개월21일이다. 풋풋했던 신종길은 이제 34세 베테랑이 됐다. 역대 최고령 기록은 ‘적토마’ LG 이병규(은퇴)가 2013년 7월5일 목동 넥센전에서 38세8개월10일에 달성한 것이었다. 당시 이병규는 마지막 3루타를 완성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전력질주를 하다 햄스트링 통증이 발생해 이후 몇 경기를 쉬어야만 한 에피소드도 있다.

안치용(현 KBSN 해설위원)은 유일하게 1군과 2군(퓨처스리그)에서 사이클링히트를 뽑아낸 진기한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LG 시절이던 2003년 4월15일 2군 상무전(원당구장)에서 달성한 뒤 2008년 6월26일 1군 삼성전(대구 시민야구장)에서 기록해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역대 2군 사이클링히트는 총 25차례 나왔는데, 현역 선수 중 이종환(한화), 문선재(LG), 김재환, 최주환, 민병헌(이상 두산), 문선엽(삼성), 김사연(kt), 권희동(NC), 임병욱(넥센)이 2군에서 기록한 바 있다. 이들 중 1군에서 기록을 달성한다면 안치용의 후계자가 된다.

구단별로 보면 삼성과 두산이 5차례로 가장 많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KBO리그 팀 중에 SK는 사이클링히트를 한 번도 기록하지도, 허용하지 않은 유일한 팀이라는 사실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마이애미가 유일하게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지 못한 팀으로 남아 있다.

지난 2013년 KBO리그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할 당시 이병규. 사진제공|LG 트윈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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