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한일전의 간절함을 월드컵 본선에서도 보고 싶다

입력 2017-12-18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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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프리킥 골로 쐐기를 박은 염기훈이 그라운드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결코 흥분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동료들이 뒤를 따랐다.

각본처럼 다같이 산책하듯 뛰었다. 골문 뒤편에 위치한 일본 응원단은 숨죽인 듯 조용했다. 7년 전 남아공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사이타마에서 벌어진 한일전에서 박지성이 선제골을 넣은 뒤 일본 관중들을 바라보며 뛴 ‘산책 세리머니’의 데자뷔였다. 태극전사의 위용을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

동아시아축구연맹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에서 우리는 일본을 4-1로 물리쳤다. 이렇게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둔 적이 또 언제였던가. 그것도 일본축구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만들어낸 완벽한 대첩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승리였다.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승리한 건 2010년 5월 이후 7년7개월 만이다. 또 일본에 3골 차로 이긴 건 1982년 정기전(3-0) 이후 35년만이고, 4-1로 이긴 건 1979년 6월 이후 38년만이다.

한일전은 자존심 싸움이다. 결과엔 변명이 필요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겨야하는 게 한일전이다. 질 경우 잃는 게 많다. 반대로 이기면 얻는 게 많다. 그게 라이벌전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일본의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은 세계적인 지도자다. 월드컵 본선 티켓도 따냈다. 하지만 한일전 패배로 많은 걸 잃었다. 여론은 ‘최악의 경기’라고 맹비난했다. 지도자의 무능력을 꼬집었다. 감독은 코너에 몰렸다. 본선까지 맡겨도 좋을 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런 혼란은 아마도 상당기간 지속될 듯하다.

한국이 졌어도 똑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니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질론은 불 보듯 뻔했다. 본선이 코앞인데도 감독 교체 문제를 놓고 몇 개월 허송세월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겼다. 덕분에 신태용 감독은 많은 걸 챙겼다. 전술의 완성도를 높인 점이나 상대 전력분석, 선수기용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팬들의 신뢰도 회복했다. 이 모두가 승리의 전리품이다. 경기는 이기고 봐야하는 스포츠의 속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경기였다.

신 감독의 머릿속에는 지난 4개월의 억울함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 시간은 가시밭길이었다. 본선 티켓 확보가 불안한 상황에서 사령탑에 오른 신 감독은 도전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이란과 우즈베키스탄과의 최종예선 2경기를 비기고는 본선행을 확정했다.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여론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경기력이 문제였다. 축하 헹가래도 논란거리였다. 일은 자꾸 꼬여만 갔다. 히딩크 감독 영입 논란은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죄인이 된 듯한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됐다. K리거를 뺀 멤버로 나선 10월 유럽원정 평가전에서 졸전을 보인 탓에(러시아 2-4 패, 모로코 1-3 패) 신 감독은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받았다.

반전은 국내에서 열린 11월 평가전이었다. 콜롬비아(2-1 승)와 세르비아(1-1 무)를 상대로 가능성을 보여주며 비로소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팬들의 마음도 조금 열렸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동아시안컵은 이런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열렸다. 시즌을 마무리하는 대회인데다 이후 A매치는 3개월 이후에나 열린다. 결과가 중요했다. 중국과 북한전에서는 만족감을 주진 못했다. 숙명의 라이벌전인 일본전마저 신통치 않은 경기력이라면 악몽이 되풀이 될지도 몰랐다.

선수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간절함이 컸다. 천만다행으로 모든 게 잘 풀렸다. 이번 대회 가장 좋은 경기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면서 완승을 거뒀다. 극적인 막판 뒤집기였다.

우리는 올해 마지막 A매치를 해피 엔딩으로 장식했다. 시련이 많았던 만큼 감독과 선수 모두 한해를 보내면서 한 뼘은 성장했을 것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팬들의 관심과 지원도 더해졌다.

이제는 자신감을 갖고 본선을 준비하자. 그리고 한일전에서 보여준 간절함을 월드컵 본선에서도 보여줬으면 한다. 그게 한국축구를 살리는 길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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