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V리그 우승감독 이성희, 시골 초등학교 감독으로 간 까닭은?

입력 2018-04-20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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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학년으로 구성된 전북 고창 흥덕초등학교 배구부원과 이성희 감독. 그의 부임 이후 9명으로 늘어난 꿈나무 선수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춰 배구의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감독은 “이 선수들과 함께 내년 5월에 열리는 소년체전 본선에 출전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사진제공 | 고창 흥덕초등학교 배구부

4∼5학년으로 구성된 전북 고창 흥덕초등학교 배구부원과 이성희 감독. 그의 부임 이후 9명으로 늘어난 꿈나무 선수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춰 배구의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감독은 “이 선수들과 함께 내년 5월에 열리는 소년체전 본선에 출전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사진제공 | 고창 흥덕초등학교 배구부

■ “아이들 만나러 고창 가는 길, 차창 밖 세상이 새롭게 보입니다”

슈퍼리그 MVP·V리그 우승 사령탑
후배 소개로 간 고창 흥덕초등학교
배구명문이지만 남학생은 32명 뿐

아이들과 급식 먹고 서너시간 지도
훈련장을 즐겁게 오게하는 게 목표
이젠 지원자 늘어 선수가 9명 됐죠

성적이란 괴물에 쫓기며 살았어요
내려놓으니 다른 세상이 보이는걸
아이들과 눈높이 대화, 제가 배워요


요즘 배구계의 화제는 이성희 전 인삼공사 감독이다. 전라북도 고창의 전교생 73명의 시골학교 흥덕초등학교(최석진 교장)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소식이 전해져서다. 그는 2015∼2016시즌을 끝으로 인삼공사 사령탑에서 물러난 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

1996년 슈퍼리그 MVP이자 V리그 우승감독이 초등학교 감독으로 전직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와 연락이 닿았다.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7∼2018시즌을 앞두고 V리그의 경기운영위원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교육까지 마쳤지만 시즌을 앞두고 방향을 틀었다. “이전부터 남자팀을 지도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진주 동명고와 인연이 닿아서 그 곳으로 갔다”고 했다. 오래 있지는 못했다. 경남체육회에서 지원이 끊기는 바람에 팀을 떠났다. 이때 후배가 흥덕초등학교를 소개했다. 남학생이 32명뿐인 시골학교였다. OK저축은행 송희채가 이곳 배구부 출신이다.

109년 된 흥덕초등학교는 배구명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시골 학교처럼 학생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런 곳에서 지도하는 것이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게는 한동안 비밀로 했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시골에 다녀온다고만 했다. “노느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 도와줘야겠다”며 나중에 아내를 설득했다. 보수는 프로감독 시절의 연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재능기부였다.

이성희 전 인삼공사 감독. 스포츠동아DB

이성희 전 인삼공사 감독. 스포츠동아DB



● 내려놓고 천천히 가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바삐 살았다. 성적이라는 괴물에 쫓겨 주위에 상처를 줬고 여유 없이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현장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은 힘들었다. “다시 코트로 돌아간다는 열망은 컸고 한창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자 조바심만 커졌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 선택을 계기로 자신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였다. 주중에는 고창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가족이 기다리는 하남으로 올라온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매주 아이들과 운동을 위해 고창으로 가는 차창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욕심을 내려놓자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시골학교의 관사에서 혼자 지내는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학교급식을 먹으면서 지낸다. 주중 수업 시작 전 50분과 수업 뒤 2∼3시간씩 하는 훈련은 힘들지만 재미있게 한다. 아이들이 훈련장에 오는 것이 즐겁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요즘 집집마다 귀한 자식들이 운동하는 것을 부모들이 꺼려하는 이유는 학교 운동부의 억압적인 지도방식 탓이다. 아이들은 지도자에게 혼나고 맞아가면서 하는 운동부는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이를 두려워한다.

반대로 자율을 강조하고 즐기면서 하는 유소년 클럽에는 기량 좋은 선수들이 넘친다. 지금 우리 배구에 시급한 일은 유소년 클럽의 유망주들을 본격적인 선수로 전환시키는 일이지만 이는 학교 지도자들의 생각이 바뀌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지도방법이 정착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이성희 감독은 “기죽은 아이들이 겁을 먹고 감독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고, 감독은 애들에게 소리 지르고 억압적으로 훈련시키는 문화를 바꿔보고 싶었다”고 했다. 일단은 그의 등장에 배구부 아이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지역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자 배구 지원자도 2명 늘어 선수가 9명이 됐다.

이성희 전 인삼공사 감독. 스포츠동아DB

이성희 전 인삼공사 감독. 스포츠동아DB



● 배구로 혜택 받았던 사람들은 아래를 보고 헌신을 생각하자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이제 막 배구를 시작하는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 눈높이에 맞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솔직히 짜증도 난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다. 아이들과 지내다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했다. 나를 비우면 채울 수 있는 것이 많이 생긴다. 이성희 감독은 배구 꿈나무였던 예전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요즘 갈수록 꿈나무 자원이 줄어든다고 배구계는 걱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감독의 선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V리그를 경험한 많은 베테랑 사령탑들이 있다. 대부분 현역복귀를 꿈꾸며 경기장을 찾고 배구연맹 사무실 주위를 맴돈다. 몇몇은 자신에게 기회를 줄 연줄을 찾느라 바쁘다.

이들은 배구를 통해 많은 것을 누린 사람들이다. 지금 쉬고 있는 감독들에게 이 참에 새로운 선택을 권유한다. 시골의 조그만 학교를 찾아 아이들을 지도하고 주위에 배구의 즐거움을 알리는 전령사가 되기를 부탁드린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다면 세상 어떤 선수와도 신뢰관계를 만들고 지도할 수 있다고 기자는 믿는다. 그런 능력 있는 감독을 그냥 내버려둘 팀은 없다. 굳이 현장 컴백이 아니더라도 배구를 통한 재능기부는 진정으로 존경받는 배구인으로 남고 배구계에 보답하는 길이다. 아래를 보고 미래의 씨앗을 뿌리는 봉사활동은 V리그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 이성희는?


▲출생=1967년 9월(충북 청주)

▲학교=의림공업고등학교~서울시립대학교

▲선수 경력=서울시청(1986~1990년), 고려증권(1990~1998년),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르SV 부퍼탈(1998~2000년), 대한항공(2000~2002년)

▲지도자 경력=현대건설 코치(2002~2003년), GS칼텍스 수석코치(2003~2008년), GS칼텍스 감독(2008~2010년), 여자대표팀 감독(2008~2009년), 인삼공사 수석코치(2011~2012년), 인삼공사 감독(2012~2016년)

▲수상 경력=1996년 슈퍼리그 MVP(고려증권)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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