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훈련장 가다] 박기원식 자율배구와 선수 이후의 인생을 위한 교육

입력 2019-06-10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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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박기원 감독. 스포츠동아DB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 스포츠동아DB

챔피언결정전을 하느라 다른 팀보다 시즌을 늦게 마친 대한항공은 5월1일부터 다음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대학팀과 연습경기도 하는 한국전력과 비교하면 출발이 늦었다. 하지만 자유로움 속에서 선수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알고 미리 준비해오는 시스템이 정착됐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다. 박기원 감독이 지난 시즌 “이제는 너희들을 믿어도 되겠다”고 털어놓았을 만큼 선수들은 비 시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준비도 잘 해왔다.


● 안착한 자율과 워라밸 배구

선수들은 자율훈련 기간에도 일주일에 3번 이상 헬스클럽에서 몸을 단련해 왔다. 체력전담 트레이너가 나눠준 프로그램을 정성껏 소화했다. 부상선수들도 쉬는 동안 트레이너로부터 재활치료를 받고 병원을 찾아다니며 몸을 관리해왔다. 예전에는 이런 과정이 훈련을 시작하고 나서야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훈련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효율도 떨어졌다. 훈련 준비기간이 길수록 선수들은 빨리 훈련장과 합숙소를 벗어나고픈 생각만 한다. 박기원 감독 체제이후 대한항공은 많이 쉬게 해줘도 선수들이 알아서 준비해오는 팀이 됐다.

자율배구가 정착하면서 선수들은 운동을 생활화했다. 덕분에 함께 모여서 훈련하는 시간은 더 짧아졌다. 주중 오전 훈련은 9시30분 시작. 오후 훈련은 2시30분 시작이다. 다른 팀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모든 팀에게 다 공평하게 분배된다. 특별히 오전 7시부터 하루를 시작했던 팀도 있지만 그래봐야 오래 버티지 못한다.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쉬는 것이다. 비 시즌은 한정된 시간에서 누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동하고, 선수들이 집중력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느냐마느냐의 싸움이다. 대한항공은 그 효율성이 높은 팀이다.

하루 훈련을 마치면 선수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기자가 찾아갔던 날에도 경기도 신갈의 대한항공 훈련장에는 훈련종료 시간에 맞춰 남편을 데리러 오는 선수들 아내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미혼선수를 제외하고 기혼선수 대부분은 집에서 출퇴근하며 시즌을 준비한다. 요즘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이 자주 언급된다. 워라밸이 높을수록 조직원들의 충성심과 자부심이 커진다. 대한항공은 워라밸 높은 훈련시스템으로 새로운 시즌을 준비한다. 덕분에 훈련장에 오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은 밝다. 억지로 하는, 훈련 때 하기 싫어서 죽겠다는 마음이 얼굴과 행동에 빤히 나타나는 팀과는 비교된다.

● 전력누수를 막고 가스파리니와 아름답게 이별하다

대한항공은 이번 FA이적시장에서 정지석 곽승석을 모두 잔류시켜 전력의 손실을 막았다. “나와 함께할 의사가 있다면 미리 알려주라. 대신 회사에서 다른 팀보다 섭섭하게 대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는 베테랑 감독의 말에 일찍 잔류를 택했다. 황승빈 진성태도 남았다. FA재계약 대상자 가운데 김학민 만이 KB손해보험으로 옮겨갔지만 손현종을 영입했다. 덕분에 팀은 더 젊어졌고 높이는 높아졌다. 벌써 몇 년 째 다져왔던 전력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황승빈의 군 입대로 세터에서 불안요인은 있다. 한선수가 도쿄올림픽 예선전과 아시아선수권대회 등 수많은 국제대회에 국가대표팀 주전 세터로 계속 참가할 것이 확실하다. 그 기간동안의 훈련공백과 체력방전이 걱정된다.

대한항공에서 뛴 3시즌 동안 1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과 2번의 시즌 우승을 안겼던 가스파리니가 팀을 떠났다. 또 다른 변화다. 그는 아이들의 국제학교 일정 탓에 6월4일에야 뒤늦게 한국을 떠났다. 시즌은 끝났지만 그동안 계속 대한항공의 우산 속에서 지냈다. 떠나보내기가 아쉬워 작별모임도 여러 번 했다. 떠나기 전에 팀이 정성을 다해서 만든 기념패를 전달하자 가스파리니의 아내는 감동해서 울었다. 가스파리니도 뒤에서 눈물을 보였다.

함께 했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배려해준 대한항공의 깊은 정에 가스파리니는 고마워했다. 대한항공 선수단과 박기원 감독은 다음 시즌 일본 V리그에서 활동할 그의 선전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사진제공|대한항공·KOVO

사진제공|대한항공·KOVO


● 점보스 자기개발 프로그램과 대한항공의 비전

대한항공의 비시즌 훈련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매주 수요일 오후에 진행되는 교육(점보스 자기개발 프로그램)이다. 5월22일부터 10주 동안 진행된다. 오후 2시에 시작해 3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진행되는 교육이다. 몸으로 하는 것이 더 익숙한 선수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하는 목적이 있다. 글로벌 비지니스 매너~스포츠인의 자기관리~생활영어~IT~자산관리~건강관리~커뮤니케이션 스킬 등으로 이어지는 교육프로그램을 보면 대한항공의 깊은 생각이 드러난다.

대한항공은 은퇴 이후 30여년의 긴 인생을 살아갈 선수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이다. 선수생활 동안에는 모르겠지만 은퇴하고나면 이들 앞에는 험난한 사회가 기다린다. 운동에만 열중하느라 몰랐고 배우지 않았던 사회생활의 ABC를 갖추지 않고 은퇴하면 선수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가 되기 쉽다. 대한항공은 최고경영진부터 이런 현실을 걱정하고 선수 은퇴 이후의 삶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장도 경영진의 올바른 정책방향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는 선수생활 때 사회인으로 필요한 교육을 시켜줘야 하는 것이 팀의 도리이자 책임이라고 믿는다. 선수들이 이런 진짜 교육을 잘 받고 조직의 구성원으로 일도 잘 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은퇴 뒤 좋은 직장에 취업하도록 돕겠다는 생각도 담겨 있다. 이처럼 구단은 선수들에게 “팀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 개발을 하면 좋은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하려 한다.

마침 기자가 훈련장을 방문했던 날의 강의는 생활영어 첫 시간이었다. 선수들은 대한항공 전문 교육 팀으로부터 비행기나 공항에서 쓰는 필수 영어표현을 배웠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갔을 때 기내에서 하는 영어~입국신고서 작성~출입국 관리소에서의 대화~수화물 찾기 등의 순서로 교육이 진행됐다. 실제 생활에 필요한 것들로 현장느낌이 충분히 났다. 선수들은 각자 영어 이름을 만들어 입국신고서도 직접 작성했다. 수화물을 잃어버렸을 때의 대화, 영어 대화를 듣고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시간도 있었다.

편하게 둘러앉아서 선수들은 단어 위주로 서툴지만 영어를 썼다. 이것을 보고 서로 웃어가면서 교육이 진지하게 진행됐다. 선수들은 우버 앱 사용방법, 해외에서 통역과 동시번역을 도와주는 앱의 사용법도 함께 배웠다.

앞으로 호텔과 식당에서 사용하는 영어와 팁을 어떻게 얼마나 주는지 등의 교육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영어교육은 당초 3주 연속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선수들의 요구로 시간표가 변경됐다. 모든 선수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자산관리가 국가대표 선수들 차출 일정과 겹치자 영어교육과 순서를 바꿨다.

이 강좌 또한 힘들게 번 돈을 잘 관리해서 은퇴 이후의 생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구단의 배려가 담겨 있다. 지금 대한항공은 눈앞의 성적이나 배구보다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힘은 바로 제대로 된 비전이다.

신갈|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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