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박기원 감독. 스포츠동아DB
● 안착한 자율과 워라밸 배구
자율배구가 정착하면서 선수들은 운동을 생활화했다. 덕분에 함께 모여서 훈련하는 시간은 더 짧아졌다. 주중 오전 훈련은 9시30분 시작. 오후 훈련은 2시30분 시작이다. 다른 팀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모든 팀에게 다 공평하게 분배된다. 특별히 오전 7시부터 하루를 시작했던 팀도 있지만 그래봐야 오래 버티지 못한다.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쉬는 것이다. 비 시즌은 한정된 시간에서 누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동하고, 선수들이 집중력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느냐마느냐의 싸움이다. 대한항공은 그 효율성이 높은 팀이다.
하루 훈련을 마치면 선수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기자가 찾아갔던 날에도 경기도 신갈의 대한항공 훈련장에는 훈련종료 시간에 맞춰 남편을 데리러 오는 선수들 아내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미혼선수를 제외하고 기혼선수 대부분은 집에서 출퇴근하며 시즌을 준비한다. 요즘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이 자주 언급된다. 워라밸이 높을수록 조직원들의 충성심과 자부심이 커진다. 대한항공은 워라밸 높은 훈련시스템으로 새로운 시즌을 준비한다. 덕분에 훈련장에 오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은 밝다. 억지로 하는, 훈련 때 하기 싫어서 죽겠다는 마음이 얼굴과 행동에 빤히 나타나는 팀과는 비교된다.
● 전력누수를 막고 가스파리니와 아름답게 이별하다
대한항공에서 뛴 3시즌 동안 1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과 2번의 시즌 우승을 안겼던 가스파리니가 팀을 떠났다. 또 다른 변화다. 그는 아이들의 국제학교 일정 탓에 6월4일에야 뒤늦게 한국을 떠났다. 시즌은 끝났지만 그동안 계속 대한항공의 우산 속에서 지냈다. 떠나보내기가 아쉬워 작별모임도 여러 번 했다. 떠나기 전에 팀이 정성을 다해서 만든 기념패를 전달하자 가스파리니의 아내는 감동해서 울었다. 가스파리니도 뒤에서 눈물을 보였다.
사진제공|대한항공·KOVO
● 점보스 자기개발 프로그램과 대한항공의 비전
대한항공은 은퇴 이후 30여년의 긴 인생을 살아갈 선수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이다. 선수생활 동안에는 모르겠지만 은퇴하고나면 이들 앞에는 험난한 사회가 기다린다. 운동에만 열중하느라 몰랐고 배우지 않았던 사회생활의 ABC를 갖추지 않고 은퇴하면 선수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가 되기 쉽다. 대한항공은 최고경영진부터 이런 현실을 걱정하고 선수 은퇴 이후의 삶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장도 경영진의 올바른 정책방향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마침 기자가 훈련장을 방문했던 날의 강의는 생활영어 첫 시간이었다. 선수들은 대한항공 전문 교육 팀으로부터 비행기나 공항에서 쓰는 필수 영어표현을 배웠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갔을 때 기내에서 하는 영어~입국신고서 작성~출입국 관리소에서의 대화~수화물 찾기 등의 순서로 교육이 진행됐다. 실제 생활에 필요한 것들로 현장느낌이 충분히 났다. 선수들은 각자 영어 이름을 만들어 입국신고서도 직접 작성했다. 수화물을 잃어버렸을 때의 대화, 영어 대화를 듣고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시간도 있었다.
편하게 둘러앉아서 선수들은 단어 위주로 서툴지만 영어를 썼다. 이것을 보고 서로 웃어가면서 교육이 진지하게 진행됐다. 선수들은 우버 앱 사용방법, 해외에서 통역과 동시번역을 도와주는 앱의 사용법도 함께 배웠다.
이 강좌 또한 힘들게 번 돈을 잘 관리해서 은퇴 이후의 생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구단의 배려가 담겨 있다. 지금 대한항공은 눈앞의 성적이나 배구보다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힘은 바로 제대로 된 비전이다.
신갈|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