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줄도 버릴 수 없는 고전의 위엄” 연극 갈매기 [공연리뷰]

입력 2023-01-02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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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오감으로 경험해야 한다. 시간의 칼이 아무리 단단하고 날카로워도 고전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연극 ‘갈매기’는 안톤 체호프가 쓴 희곡으로 1896년에 초연됐다. 무려 127년 전의 작품이란 얘기다. 100년도 더 지난 작품이지만 관객은 2023년 1월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127년 전 러시아의 하늘을 날던 갈매기는 여전히 우리들의 눈과 마음 위를 날고 있다.

이순재가 배우 겸 연출을 맡아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이순재의 연출은 고전적이면서 고전적이지 않다. 인터미션 없이 2시간 20분 동안 객석을 향해 단 한 줄도 삭제하거나 변용할 수 없는 체호프의 대사들을 퍼붓듯 쏟아낸다.


요즘 입맛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옛 것을 고집하지 않는 균형이 놀랍다. 배우들의 연기에서는 연출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존중이 느껴졌다. 잘 조련된 오케스트라처럼 기민하게 연출의 의지를 무대에서 완벽하게 구현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당하게’ 구식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덕분에 원전의 맛이 살아났다. 대사 하나 하나의 질감이 손으로 만지듯 현실적이다. 신구 조화를 이룬 캐스팅도 적절하다. 푸짐한 밥상에 손이 가는 찬도 많다.

이순재는 갈매기에 ‘개혁’의 메시지를 진하게 불어 넣었다. 갈매기는 당시의 사회상을 투영한 작품이었다.


갈매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꼬스쨔(뜨레블례프)는 자신을 갈매기에 비유했지만, 결국 진정한 갈매기는 니나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는 세 종류의 갈매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갈매기, 총에 맞아 떨어지는 갈매기,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박제된 갈매기까지.
갈매기는 이상과 자유를 향한 소망과 욕구이자 꺾인 꿈이다. 그 꺾여버린 꿈은 누군가에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영지 관리인 샤므라예프가 가져온 갈매기 박제를 보고 “난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뜨리고린의 외면은 차갑고, 쓰고, 허탈하다.

무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단 한 명도 평면적이지 않다. 체호프의 작품답게 극중 인물들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인간적’이다.


이항나는 쉐프킨 연극대 출신의 러시아 유학파로 체호프의 작품은 그의 전문 분야라고 봐야 한다. 왕년의 스타 여배우 ‘아르까지나’의 속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나온 사람처럼 완벽하게 살렸다. 아들 꼬스쨔에 대한 사랑과 혐오와 갈등, 연인 뜨리고린에 대한 존중과 집착, 허영 이면의 현실. 이항나의 아르까지나는 체호프가 대본을 쓰기 위해 쟁여놓은 서랍 속 방대한 개인 자료들까지 섭렵한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뮤지컬, 연극을 오가며 활발하게 무대연기를 해 온 정동화의 꼬스쨔도 좋다. 웃고, 유쾌히 떠들고 있을 때조차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꼬스쨔. 어딘지 과장되어 보이는 몸짓은 이 불길함을 부정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저항처럼 느껴진다.


니나의 김서안은 처음 보았는데 원작의 캐릭터를 잘 묘사해냈다. 4막 꼬스짜와의 재회 신에 등장하는 니나의 독백은 상당히 유명해 연기학원에서도 곧잘 트레이닝 텍스트로 활용되곤 하는데, 김서안은 감정의 기복이 크고 변화가 많은 니나의 심리를 설득력있게 드러냈다.

아르까지나의 오빠이자 대지주인 소린 역의 주호성은 명불허전의 묵직한 연기로 극의 중심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 역은 이순재와 더블 캐스팅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아크컴퍼니, VAST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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