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핀 붉은 꽃 한 송이” 정민·최우리의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7]

입력 2023-02-27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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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다크 초콜릿을 씹는 듯한 작품 … 쌉싸름한 인생의 맛
정민 ‘늘 준비된 배우’, 순수와 광기의 보이체크 열연
최우리 복귀작, 캐릭터가 확 살아나는 ‘한 꼬집’의 해석
‘보이첵’, ‘보이체크’로 표기돼 헷갈리기도 하지만 모두 같은 작품입니다. 원전이 동일합니다. 독일작가 게오르그 뷔히너의 희곡이죠.

소개해드릴 작품이 ‘보이체크’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오늘은 ‘보이체크’를 따르기로 합니다.
먼저 간단히 공부!

보이체크(Woyzeck)는 게오르그 뷔히너(1813~1837·독일)의 유작입니다. 많은 유작들이 그렇듯 뷔히너도 이 희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불과 24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사후 42년이나 지난 1879년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무려 19세기 작품이랍니다. 가장 오래된 판본이 1836년이라고 하니 작가가 죽기 직전까지 묵혀두며 고치고 고친 작품이었습니다. 뷔히너가 ‘보이체크’를 얼마나 애정하였는지 엿볼 수 있지요.

보이체크는 실제로 벌어졌던 형사사건이 모티브입니다. 여기서 영감을 받아 쓴 희곡 보이체크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희곡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른바 ‘표현주의적 드라마’의 효시로 불리는데요.

이런 류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보이체크도 상당히 어둡고 무거운 편입니다.

보이체크는 사람 이름입니다. 군인인데 평범한 병사죠. 월급이 얼마나 짠지 돈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줄 꽃 살 돈도 없어 꽃씨를 심어야 할 정도니까요.

그 순수한 모습을 보고 반한 술집 여가수 마리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지만 행복은 여기까지. 아이가 큰 병에 걸리자 치료비가 필요해집니다. 보이체크는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야근에 특근까지 자원하며 몸을 혹사하지만 돈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결국 이상한 연구를 하는 박사의 위험한 임상실험에 참여하게 되고, 수상한 약을 복용하면서 점점 미쳐갑니다. 아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다시 술집에 노래하러 나간 아내와 장교의 관계를 의심한 보이체크는 결국 광기에 휩싸인 채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이 극은 마무리됩니다.

여기까지가 희곡 보이체크의 기본 플롯.

그런데 앞서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다 보니 후대의 작가, 연출가, 감독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 됩니다. 보이체크가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무용,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어 온 것도 이런 요인이 큽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보이체크는 뮤지컬 버전이죠. ‘보이체크 인 더 다크’라는 다소 긴 제목을 갖고 있는데, 에이스튜디오가 제작했습니다.

일단 제목부터 ‘다크’하지 않습니까. 인터미션 없이 딱 90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지만 웃을 일이 없는 작품입니다.

보이체크는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작가와 연출, 배우에 따라 각색이 들어가기 때문인데요. ‘보이체크 인 더 다크’도 그렇습니다. 99% 순도의 다크 초콜릿을 맨 입으로 씹는 맛이랄까요. 대사, 넘버, 장면 하나하나가 쌉싸름합니다. 한 번에 꿀꺽 삼켜지지 않아 혀로 오랫동안 굴리고 있으면 그제서야 이 작품의 진짜 깊은 맛이 올라오게 됩니다.

보이체크는 꽃씨를 심는 주인공의 순수함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의 좌절과 고통을 어떻게 의미있고 개연성있게 차곡차곡 쌓아 올리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보이체크 인 더 다크’의 공연장(링크아트센터 벅스홀)은 7명 배우의 움직임을 품기에는 넉넉하지 않은 공간이더군요. 박지혜 연출은 스카프, 인형과 같은 소품과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공간을 최대한 압축합니다. ‘카를’이라는 인물을 해설자로 설정한 것도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극의 스피드를 내면서도 관객들이 흐름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보이체크의 좌절과 방황을 어둠에 묻은 가운데 나머지 배우들이 손전등을 활용해 주인공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장면을 표현한 연출도 돋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오브제, 상징으로 기능하는 꽃을 붉은 스카프로 대신한 것도 흥미로운 시도였습니다. 마리의 죽음을 애도하며 던져지는 것도 꽃이 아닌 스카프입니다.

‘레드’ 또한 작품 속에서 멋지게 활용됩니다. 무채색의 무대 안에서 ‘레드’는 유일한 채색입니다. 주인공의 입술만 붉게 채색해 강렬한 도드라짐 효과를 얻어냈던 예전의 흑백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합니다. ‘레드’는 강렬하면서도 순수하고, 때로는 처연해지기까지 하는 마리를 상징하는 컬러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 작가와 연출은 서두르지 않고 보이체크의 광기와 분노를 착실히 쌓아 올립니다. 그 결과 극의 하이라이트에 다다라 엄청난 박력과 압박감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날 보이체크는 정민, 마리는 최우리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최우리


정민 배우의 훈훈하고 순수한 이미지가 보이체크와 잘 어울립니다. 정민 배우는 흥미롭게도 2005년 ‘사랑하면 춤을 춰라’, 일명 ‘사춤’으로 데뷔했죠. 한 마디로 안무에 일가견이 있는 배우란 얘기. 정민 배우의 연기 선이 유독 우아하고 고운 비결이 여기에 있을 겁니다.

정민 배우는 작품을 끊임없이 하는 ‘다작러’ 중 한 명이죠. 다작러의 장점은 ‘늘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곧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언제든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배우라는 얘기죠. 그래서 언제 가서 보아도 기복이 없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입니다. 최우리 마리와의 케미도 만족스럽습니다.

최우리 배우의 연기는 꽤 오랜 만입니다. 결혼과 출산 등으로 한동안 무대를 떠나 있던 그가 보이체크의 ‘마리’로 복귀했습니다.

최우리 배우는 뮤지컬 장르에서 주로 활동하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이 깊은 배우죠. 대학(단국대)에서의 전공도 연극영화였습니다. 일본 히트영화의 연극버전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17)’에서 보았던 최우리의 ‘조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여운까지 길어 지금도 선합니다. ‘페리클레스(2015)’도 연극작품이었죠. 이처럼 최우리 배우는 노래 못지않게 연기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배우입니다.

뮤지컬과 연극의 몇몇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최우리 배우의 캐릭터 분석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파격적’, ‘개성의 표출’ 쪽이라기보다는 대본 속의 캐릭터를 충실히 따라가는 스타일인데, 여기에 살짝 살짝 넣는 자신만의 해석이 ‘조미료 한 꼬집’처럼 효과적입니다. 뭔가 대단한 것, 엄청난 것을 시도하지는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캐릭터와 작품의 맛이 ‘확’ 살아나니 신기한 일이죠.

이는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에서도 드러나는데, 객석에 앉아 있으면 ‘저건 진짜다’라는 공감이 완벽하게 전해져 옵니다.

‘보이체크 인 더 다크’에서 궁금한 부분이 있습니다.

광기에 휩싸인 보이체크는 마리와 춤을 추던 중 칼로 마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마리는 죽어가면서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울림이 강한 장면이죠.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마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머뭇거리는 보이체크에게 “마지막으로 우리 춤추자”며 손을 내민 마리의 대사가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마리의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최우리 마리의 대답은 “마리가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작은 보이체크가 마리를 죽이지만, 우리 작품은 마리가 죽음을 선택해요. 마리는 자신 앞으로 다가온 칼끝을 보며 두려워하기보다는 서로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데려가 보이체크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당신이 그런 게 아니라는 대사가 굉장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 정신이 아닌 보이체크지만 혹시라도 나(마리)의 죽음이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오롯이 나의 선택이라고 꼭 인지시켜주고 싶어 한 말이 아닐까요.”

여기에 최우리 배우는 자신만의 해석을 ‘한 꼬집’ 더했습니다.

“저는 마리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힘들었던 것, 우리가 만난 것, 우리가 함께 힘들었던 것, 아기가 떠난 것, 실험에 참여해 제 정신을 잃어가고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 이 모든 당신의 아픔은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무대에서 이 대사를 합니다. 보이체크를 만나 행복했던 짧은 순간의 기억을 갖고 눈을 감으려는 마리의 의지가 큰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최우리 배우의 복귀작이죠. 보이체크는 상당히 어둡고 무거운 작품인데요. 이런 작품을 복귀작으로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복귀작은 연극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인연이 닿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중 보이체크 대본을 만나게 되었고요. 제가 무겁고 어두운 연기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또 이 작품은 뮤지컬이지만 연극적인 요소도 아주 크겠다는 판단이 들어 출연을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젤(아기 이름)이 죽고나서부터 마지막 장면까지의 부분이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죠.”

제가 본 날은 운이 좋게도 커튼콜 데이 기간이었습니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의 무대인사가 끝나고 나면 잠시 후 하이라이트 몇 장면이 재연되었는데요. 관객들이 부담없이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되돌아보며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에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얘기를 왜 우리는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

쓰디썼던 오늘 하루를 보내주는 데에 쓴 소주 한 잔만한 게 또 있겠습니까.
입맛이 쓴 이 작품을 꿀꺽 삼키고 나니 절로 소리가 나옵니다.
“크으~ 좋구나.”

네, 그런 겁니다.

※ 일일공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 편은 공연을 보자’ 대국민 프로젝트입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탄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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