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 킹콩by스타쉽
하나는 본명 안지혜. 지혜롭게 살라는 의미로 부모님이 지어줬다. 2015년 영화 ‘인 허 플레이스’로 데뷔할 무렵까지 활동명으로도 썼다. 이후에는 직접 지은 ‘안소요’라는 이름으로 여러 편의 독립영화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노니는 모습’을 뜻하는 단어가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다른 이름은 ‘김경란’이다. 최근 세계에서 뜨거운 인기를 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를 통해 새롭게 얻었다. 극중 학폭 가해자인 임지연과 그의 친구들로부터 신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하고도 그들을 떠나지 못한 김경란 역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덕분이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스포츠동아 사옥에서 만난 그는 “이제는 사람들이 ‘경란이 맞으시죠?’라며 알아본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어 “시청자들이 ‘경란이가 꽃길을 걸었으면 좋겠다’고 보내주는 응원이 나에게까지 오는 것 같다. 이 응원을 땔감 삼아서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눈빛을 반짝였다.
Q. 극중 캐릭터 중에서 가장 늦게 캐스팅된 것으로 아는데.
“2021년 겨울에 오디션을 두 번 봤어요. 김은숙 작가님, 안길호 감독님, 주인공 문동은 역의 송혜교 선배. 딱 세 가지 정보만 받은 채 참여했죠. 처음에는 최혜정(차주영), 이사라(김히어라)의 대사를 받아 연기를 했더니 ‘얼굴이 아이 같아서 역할이랑 안 맞는다’고 하셨어요. 두 번째에는 문동은의 공장 동생 구성희(송나영) 대사를 했는데 이번엔 ‘역할에 비해 나이가 많은데’ 그러시는 거예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아이 엄마 역도 했고, 독립영화에선 20대 역할도 했다고 강력하게 어필했어요. 그러다 첫 촬영이 들어가기 겨우 며칠 전에 ‘경란이로 함께 하자’고 연락을 받았어요. 경란이를 오랫동안 고심한 제작진이 결국 저의 얼굴에서 경란이의 얼굴을 발견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Q. 파트2 막바지까지 송혜교 편인지, 임지연 편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그건 작가님의 의도였어요. ‘쟤 뭐가 있을 것 같은데’하는 긴장감을 줬으면 좋겠다는 디렉션을 처음부터 받았어요. 시청자들이 계속 제 역할을 주목하면서 이런저런 힌트를 끌어내는 게 신기하기만 했죠. 지난해 12월 파트1이 나오고 나서 지난달 초 파트2가 나오기 직전까지 주변에서 ‘네 정체가 도대체 뭐야?’라며 엄청 추궁 당했어요. 하하! 스포일러를 피하느라 애먹었죠. 재미있는 추억이 됐어요.”
Q. 경란이가 학폭 가해자 무리의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시청자가 많다.
“경란이를 만나면서 내가 가진 경험의 폭이나 생각의 틀로 단정 짓고,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대신 이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고교생 시절부터 30대가 된 최근까지 하루하루를 수없이 그려보고 상상해봤죠. 그러다보니 한 줄로 요약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어요. 물론 그 과정이 괴로울 수 있지만, 그게 재미있으니까 연기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어요.”
Q. 실제로는 어떤 학생이었나.
“내성적인 편이지만, 어쩌다 가끔 멍석 깔아주면 친구들을 웃기는 걸 좋아했죠. 놀라웠던 게 ‘더 글로리’가 공개된 후에 학창시절 친구들이 ‘너 참 웃겼는데’ 하면서 저를 재미있었던 친구로 기억해줬어요. 전 정말 조용한 학생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말을 듣다보니까 배우가 되고 싶었나 봐요.”
Q. 조용한 이미지를 보고 있으니 ‘웃기는 안소요’가 상상이 안 된다.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 중에 ‘말하기 수업’이 있었어요. 한 사람당 10분씩 스피치를 하는 거예요. 거기서 좌중을 ‘압도’했죠! 똥에 대해 10분 동안 말했거든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똥을 통해 건강을 자가 진단하는 방법부터 똥에 관련한 역사, 문학 등을 줄줄이 말했어요. 원래 수줍어 보이는 사람의 반전이 제일 웃긴 거잖아요. 교수님께서 매년 ‘우리 수업에 그런 애가 있었다’며 제 에피소드를 말하셨대요. 중학생 시절엔 드렁큰타이거의 랩을 인용해서 ‘니들이 라임이 뭔지 알아요?’하면서 갱스터 랩을 펼친 적이 있었답니다.”
Q.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게 어쩌면 자연스러웠겠다.
“그런 경험이 쌓였기 때문인지, 특별한 계기 없이 어릴 적부터 배우를 꿈꿨어요. 학창시절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서 열심히 공부한 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일단 진학을 했고, 거기서 연극학을 복수 전공했죠. 연극동아리에 심취한 대학 시절을 보냈어요. 과연 내가 연기를 잘 하는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해본 적은 있지만 연기 이외의 길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어느 일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고, 연기할 때만큼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없었거든요.”
Q. 데뷔 4년 만인 2019년 JTBC ‘아름다운 세상’으로 안방극장에 나왔다.
“당시 프로듀서였던 김다예 PD님이 대학 동문이라 저를 교내 연극에서 본 적이 있대요. 그 무대를 기억하고 오디션 연락을 준 거였어요. 저는 제가 돌린 프로필이 오디션 목록에 올라간 줄 알았거든요. 그때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누군가는 본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그 순간엔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져도 돌이켜보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걸음이 느리더라도 계속 나아가야겠단 다짐을 새롭게 하게 됐어요.”
Q. ‘안소요’라는 이름처럼 살고 있나.
“어릴 적부터 제 모토가 ‘소요’였어요. 고정관념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싶었죠. 배우와 딱 맞는 의미 아닌가요? 지금까지 멈춰있지 않고 계속 걸어온 거 같아요. ‘더 글로리’로 엄청난 관심을 받아 행운이었지만, 제게는 지금껏 걸어온 한 걸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만 이 세상 모든 경란이를 안아주고 싶어요. 경란이가 내게 와줘서 고맙고요. 아마 평생 마음의 한 방에 경란이가 함께 할 거예요.”
유지혜 기자 yjh030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