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만난사람]‘음악은포르테,사랑은칸타빌레’여성지휘자성시연

입력 2009-03-19 02: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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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 빠끔히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미니 단원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현대곡 특유의 불협화음이 가득한 가운데 금관이 불안한 패시지를 반복하고 있다. 지휘자 성시연이 보였다. 청바지에 어두운 줄무늬 셔츠를 헐렁하게 걸친 그녀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오케스트라와의 교감에 여념이 없다. 연주지시는 간결했다. 영어와 음악전문용어, 그리고 한국어가 뒤섞였다. 트롬본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반복이 이어진다. 말의 끝은 늘 “감사합니다”였지만 어김없이 “한 번 더”가 붙었다. 연습이 끝나고, 단원들이 악기를 챙겨들며 자리를 뜨는 사이 몇몇 단원들이 포디엄으로 달려가 지휘자에게 뭔가를 묻는다. 지휘자도 심각한 얼굴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고등학교 수학시간 종료 벨이 울린 뒤의 정경같다. 성시연씨와의 인터뷰는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일전에도 한 번 들어와 봤던 방. 그런데 이 방에 피아노가 있었던가? 서울시향의 이경구 홍보팀장이 “정명훈 선생님의 유일한 말벗”이라며 웃는다. 성시연씨는 세계가 주목하는 지휘계의 ‘영건’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휘 자체 경력보다는 콩쿠르에서의 성적이 크게 돋보인다. 2006년 게오르그 솔티 국제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에는 구스타프 말러 콩쿠르에서 1위없는 2위를 차지했다. 지난 7일에는 독일음악협회가 주관한 독일지휘자상에서 2위 트로피를 자신의 이력에 보탰다. 이 콩쿠르는 독일음악협회 지휘자포럼이 전 세계 지휘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2년 간 활동을 관찰한 뒤 단 3명만을 선정해 경합시키는 대회였다. 현재 성씨는 미국의 명문 교향악단 보스턴심포니의 부지휘자를 맡고 있다. 이 보수적인 오케스트라의 124년 역사상 여성 부지휘자는 최초의 일이다. 한국인이 미국 메이저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게 된 것 또한 정명훈 이후 30년만이다. 성씨가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은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본래 피아니스트 지망생이었던 성씨는 서울예고 졸업 후 스위스 취리히국립음악원으로 날아간다. 그러나 손목과 팔에 이상이 오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고, 우연히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와 함께 20세기 세계3대 지휘자로 추앙받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의 지휘 동영상을 보고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다. 이 점에 대해 성씨는 분명한 어조로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팔이 아팠던 건 맞아요. 1년 정도 쉬었죠. 하지만 지휘공부를 하게 된 건 제 의지였어요. 팔을 다친 건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기 5년 전쯤의 일이었고요. 지휘공부를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로 옮겼다고 보도되기도 했는데, 베를린에 가서도 저는 피아노를 쳤어요.” 대학 졸업을 1년 정도 남겨두고 ‘과연 나는 무얼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교수도 “피아노에 국한하지 말고 넓게 생각하라”며 조언해 주었다. 그러다 오케스트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 동안 볼 일이 없었던 총보(모음악보·오케스트라 전 파트를 수록한 악보)를 보기 시작했다. 유명 지휘자들의 비디오도 연구했다. “그러다 푸르트벵글러의 지휘영상을 본 거죠. 그 분의 테크닉적인 면에 감동을 받았다기보다는 … 지휘자는 자신의 몸이 악기잖아요?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해서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100% 끌어내는 모습을 보고, ‘아! 나도 이런 음악을 해보고 싶다’하게 된 거죠.” ‘음악을 폭넓게 보라’고 했던 교수조차 성씨가 지휘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자 극렬히 반대했다. 엉뚱한 생각 말고 피아노나 열심히 치라는 얘기였다. “네가 여자고, 동양인인데 지휘를 해서 뭘 하겠다는 거냐, 나이도 늦었다 … 이런 뜻이셨을 거예요. 하지만 인생 70년인데 젊은 시절에 2, 3년 새로운 경험을 해 본다는 게 꼭 제 인생을 헛되이 소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다행히 결과가 좋게 나와서 ….” - 여성지휘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도 사람의 만남과 다를 게 없어요. 딱 떨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단원들이 ‘여자 지휘자라고? 그래, 얼마나 잘 하나 보자’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중급 수준의 오케스트라의 경우가 좀 그래요. 여성 지휘자를 전혀 만나보지 못했다든지, 아니면 나쁜 경험이 있었다든지. 좀 뭐랄까 … 단원들의 시선이 느껴져요.” - 여성지휘자이기에 좋은 점도 있지 않을까요? “한 번 매스컴에 나가면 뜨죠, 하하하! 희소성이 있으니까. 어느 정도 실력이 뒷받침을 해 준다면 청중들이 좋아해요. 신기하게 보기도 하고.” - 지휘자는 단원들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음악적인 실력만으로 되는 건 아닐 텐데요. 혹시 노하우 같은 거라도? “아직 경험이 풍부하지 못해 그런 건 없고요. 노하우를 계속 개발해 나가야죠. 제 기본적인 입장은 이런 거예요. 지휘자는 앞에서 이끌어 가는 사람이니까 따라오시오 … 하고 강압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픈된 마음으로 ‘우리 같이 가자’하는 거죠. 서먹한 분위기가 되면요? 지휘 한 번 멋지게 하면 단원들 마음이 확 풀어져요. 무엇보다 웃으면서, 친절하게. 스스로 나이스하게.” 성시연씨가 보스턴에 입성하게 된 것은 상임지휘자 제임스 레바인의 힘이 컸다. 지난해 7월 미국 탱글우드 뮤직페스티벌에서 보스턴 심포니를 처음 지휘했던 성씨는 며칠 뒤 레바인이 신장암 수술을 받으면서 대타로 다시 한 번 지휘봉을 잡았고, 이것이 부지휘자로 자리를 잡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 레바인과는 평소 자주 만나시겠죠? 옆에서 본 레바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주 만나지는 못 해요. 시즌 중에 아홉 번 정도 오시니까요. 오셨을 때 제가 없을 수도 있고. 레바인은 오케스트라와 소통을 너무너무 잘 하세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난 마에스트로야!’하는 근엄한 독일 지휘자상이 아니죠. 뮤지션들을 정말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존경해 주시죠. 리허설 도중 농담도 잘 하시고요. 저는 레바인이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천재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릇이 큰 분이죠.” - 말러를 특히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영혼이 정화되는 음악’이라고도 하셨죠. 말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미국에 간 이후로는 시간이 없어서 못 즐겨요. 시간이 나면 듣죠. 연주여행을 자주 다니고, 사람들과 공적인 접촉을 많이 하다보면 아무래도 감정이 고갈된다고 해야 할까. 그럴 때 말러 음악이 품은 내면의 세계가 도움이 되죠. 지휘자 블롬슈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말러가 신을 만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브루크너는 신을 만난 사람이다’. 말러를 듣고 있으면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인간적인 내면의 갈등, 무언가에 대한 갈급함.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음악의 카타르시스 끝에 가면 해소가 되지요. 말러 지휘요? 아직은 안 했는데, 상당히 바라고 있어요.” - 일견 성공가도만 걸어온 것 같지만 힘든 시절도 있었겠죠? “유학시절이죠. IMF 때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사실 저는 지휘공부를 선생님 없이 시작했어요. 로이터 교수님께서 ‘입학시험 두 달 전부터 레슨을 해주마’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제가 알아서 해야 했죠. 지휘란 것이 지휘봉만 흔드는 게 아니잖아요. 총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오케스트라 악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전혀 몰랐어요. 시간이 너무 부족했죠.” 지휘 입학준비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피아노 졸업시험과 함께 콘서트도 2회나 치러야 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자칭 ‘묻어가는 스타일’이었던 성씨는 이때 자신을 꽉 다잡았다. 하루 4시간 수면의 날이 이어졌다. “지금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간혹 마음이 풀어지거나 할 때면 스스로 채찍질 하면서 새벽 2, 3시까지 악보를 들여다보던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하죠.” - 지휘대 위에서가 아닌 평소의 ‘성시연’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하! 뭐라고 해야 하죠? 음 … 까다로운 성격은 아닌 것 같아요. 편하다고 해야 하나. 유학생활을 통해 어려움도 겪고, 고민의 시간도 가지면서 남에게는 관대하려고 해요. 스스로에게는 가혹할지라도 타인에게는 관대하고픈 스타일.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너 지휘자 맞냐?’고 하기도 해요. 가끔은 누가 오케스트라에 와서 지휘자를 찾죠. 저는 여기 있는데, 저보고 ‘지휘자 선생님 어디 계시냐?’고 물어요. 하하하!”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서울시향 홍보담당자 백수현씨가 “정말 편하세요. 저희하고도 이야기도 많이 나누세요”하고 거든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냐”고 물으니 성씨가 “우리요? 시집가자는 얘기만 하는데요”하고 또 웃는다. - 그러고 보니 ‘때’가 되신 것 아닙니까? 설마 음악하고 평생 둘이만 사실 생각은 아니실 테죠? 결혼계획은 있으신가요? “남자친구도 없는데요 뭐. 그래서 올해는 목표를 ‘그런 쪽’으로 세웠어요. 혼자만 지내지 말자. 스타일이요? 착한 남자요. 전 외모는 안 봐요.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외모란 것이 살다 보면 익숙해져버리잖아요. 내면세계가 깊고, 그릇이 큰 남자가 좋죠.” 인터뷰 이틀 뒤, 성씨는 서울시향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시벨리우스의 ‘포욜라의 딸’,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2번’, 버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가 이날의 프로그램이었다. 소년처럼 씩씩하게 포디엄을 향해 걸어들어 온 성씨는 해외 전문지들의 평가처럼 ‘우아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연주자에게나 관객에게나 쉽지만은 않은 이날의 레퍼토리를 환상적으로 지휘해 보였다. 공연이 끝난 뒤 성씨는 몇 번이나 단원들을 일으켜 세워 관객의 박수를 나누어 돌렸다. 밝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강하게 보일 수 없었다.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박수를 보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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