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저희 집은 작은 시골마을 입구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와 육남매가 이 집에서 살았는데, 저희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하시면서 인근에 큰 공사가 있으면 인부들에게 밥도 해주셨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이 우글우글 저희 집에 와 있는 겁니다. 저는 낯선 사람이 저희 집에 잔뜩 와 있는 게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잠자코 있었던 건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오빠 한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음에 들었던 오빠 이름은 ‘강진중’으로 젊고 건강한 20대였습니다. 저는 괜히 그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마당 한 가운데서 고무줄놀이도 해보고, 밥 먹을 때 다른 아저씨들 보다 밥도 수북이 퍼서 주고, 빨래도 일부러 방까지 직접 날라다줬습니다. 그렇게 그 오빠랑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했을 쯤, 어느 날 학교 갔다 집에 왔는데 오빠가 짐을 꾸리고 있는 겁니다. “오빠가 집에 급한 일이 있어가꼬 쪼매 갔다 올라칸다. 한 며칠 있어야 하니까, 그 때까지 엄마 말씀 잘 듣고 잘 있으래이∼” 그런데 약속한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전화도 없더군요. 그렇게 그리움이 점점 서운함으로 변해갈 쯤, 제 앞으로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윤숙이가? 내 진중이 오빤데, 공부 잘 하고, 밥 잘 묵고 있나? 어무이도 안녕하시재?” “오빠∼ 워째 안 오는겨∼ 뭔 일 있어야? 아 언제 올 것이여∼” 하니까 오빠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윤숙아. 내 인제 몬 간다. 오빠 영장 나왔다. 오빠 군대 가야 한데이”라고 하더군요. 그 후로 저는 매일 매일 오빠 편지만 기다렸습니다. 하숙하던 다른 아저씨들은 이제 더 이상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었지요. 제게 그 분들은 팥 없는 찐빵, 다 타버린 성냥개비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몇 달이 흐른 후 정말 편지가 왔습니다. 받는 사람 이름에 제 이름이 적혀 있는 제 생에 첫 편지이자 첫 군사우편이었지요. 간단한 훈련병 생활이야기와 엄마 말 잘 들으라는 이야기, 휴가 때 꼭 갈 테니 따뜻한 밥 많이 떠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밤을 꼴딱 새워서 편지를 써 얼른 우체국으로 달려가 편지를 부쳤는데, 그 후로 더 이상의 편지는 없었습니다. 고된 훈련과 빡빡한 군 생활에서 하숙집 꼬마인 제 존재는 서서히 잊혀갔겠죠. 그 후로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저희 남편이 제 속 썩힐 때, 가끔 그 오빠 생각나는데 오빠도 저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있었던 하숙집. 거기에 살고 있던 20여 년 전 꼬마 아이. 오빠도 저처럼 그 때 일을 예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네요. 광주광역시 서구|이윤숙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