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고정우는 노래할 때마다 팬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왜 이렇게 슬프게 불러요?” “진심이 느껴져요.” 그 감정의 깊이가 어디서 오는지, 무대 밖 그의 인생을 듣고 나면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고정우는 어릴 적부터 트로트를 좋아했다. 또래 아이들이 아이돌을 흥얼거릴 때, 그는 나훈아와 이미자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현실은 노래보다 훨씬 더 가파른 리듬을 요구했다. 어린 시절, 그에겐 부모가 아닌 할머니가 전부였다. 엄마, 아빠, 친구, 보호자… 고정우에겐 할머니 한 사람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런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자, 인생은 급격히 달라졌다. 초등학교 5학년, 한창 자랄 시기의 아이가 할머니를 부축하고 생계를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가수가 아닌 한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할머니를 고쳐드리고 싶었어요. 예전 어르신들처럼 침 맞고, 약 지어드리고 싶어서요.” 그러나 그런 꿈조차 사치였다. 집안 형편은 학원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고, 고정우는 그저 학원 문 앞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나오는 모습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살기 위해 그는 물질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캐는 힘겨운 일이었다. “죽을까도 생각했어요. 물가에 한 시간 넘게 앉아 있었죠. 근데 TV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살아봐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상하게 그게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렇게 무서운 마음을 안고 처음 바다에 들어갔다. 추운 겨울, 제대로 따오지도 못하고 욕도 먹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버텼고, 어느 순간 어른들보다 더 많은 해산물을 따오게 됐다.

그렇게 번 돈은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남의 밭일을 하고, 나물을 뜯어 팔고, 단단히 아껴서 결국 겨울 한철 동안 50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할머니에게 목걸이와 반지를 해드렸다. “온 동네 자랑하시더라고요. 그게 제 첫 월급이자 가장 보람찬 순간이었어요.”
물질과 일을 병행하며 학교에 다닌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반장을 맡을 정도로 책임감도 있었지만,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단 한 번도 개근하지 못했고, 부모가 서류상 존재하다 보니 생계 곤란 사유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무단결석 처리로 위태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몸도 많이 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물질과 중노동으로 인해 과로로 쓰러졌고, 병원에서는 “이대로면 30대부터 병원 신세”라는 경고를 받았다. 지금도 손끝엔 감각이 없다. 겨울에 동상이 걸려도 몰랐던 시절을 지나, 그는 여전히 손끝이 얼어붙은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늘 할머니였다. 고정우는 부모의 보살핌 없이 자랐다. 엄마는 곁에 없었고, 아버지와는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부모를 보며 “어떻게 자식이 저럴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럴수록 할머니에게 더 잘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할머니는 그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제 얘기를 듣고 계셨어요. 그 순간이 평생의 빚이고, 인연이에요.” 그는 지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말한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세요. 돌아가시면 전화 한 통, 잔소리 한 마디도 못 듣습니다.”
이 모든 삶의 순간이 지금 고정우의 노래에 녹아 있다. 찬 바닷속, 얼어붙은 손, 할머니의 웃음, 그리고 매일 아침 ‘살아야 한다’고 되뇌던 시간들. 그 모든 기억이 무대 위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특별하다. 그가 말한다.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 이 노래도, 지금 이 마음도 없었을 거예요. 지금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이슬비 동아닷컴 기자 misty8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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