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쇼박스

사진제공|쇼박스


[스포츠동아 이승미 기자] 유해진의 깊은 페이소스와 박지훈의 눈부신 재발견이 장항준 감독 특유의 가벼운 연출적 결을 가까스로 메우며 비극의 무게를 지탱해낸다. 2월 4일 개봉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다.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의 가장 비운의 군주로 기억되는 ‘어린 왕’ 단종의 영월 유배기를 평범한 민초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오는 2월 4일 개봉을 앞두고 지난 21일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은 이 영화의 결과물은 명확하다. 배우들의 압도적인 열연이 영화의 온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연출자의 해학적 강박이 극의 묵직함을 상쇄해버린 ‘양날의 검’과 같은 작품이 됐다.

사진제공|쇼박스

사진제공|쇼박스

영화는 1457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쫓겨난 어린 왕 이홍위(박지훈)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궁궐의 암투 대신, 그를 맞이해야 하는 척박한 산골 마을 ‘광천골’을 비춘다.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객을 극진히(?) 모셔야 하는 임무를 맡은 촌장 엄흥도(유해진)는 감시자인 ‘보수주인’ 역할을 수행하며 어린 선왕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서사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이들의 인간적인 유대와 유배지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우정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다.

● 유해진의 페이소스와 박지훈의 발견, 연기로 메운 서사의 틈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은 단연 배우들이다. 특히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왜 그가 한국 영화계에서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독보적인 배우인지를 다시 한번 입증한다. 극 중 다소 무리수처럼 느껴지는 일부 코믹 설정조차 유해진의 능청스러운 호흡을 거치면 관객이 기꺼이 수용할 만한 ‘호감’으로 치환된다. 특히 극 후반부, 어린 왕을 향한 유사 부성애와 충심, 연민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의 젖은 눈시울은 대중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비극을 개인의 아픔으로 전이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사진제공|쇼박스

사진제공|쇼박스

단종(이홍위)을 연기한 박지훈은 이 영화의 ‘최고의 발견’이라고 꼽힐 만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다. 그가 가진 특유의 사슴 같은 눈망울은 처연한 왕의 이미지를 완벽히 구현하는 동시에, 그 속에 감춰진 강인한 생존 의지와 백성을 향한 기개를 투영해낸다. 대중이 익히 알고 있는 단종의 전형성을 넘어, 지금껏 미디어가 주목하지 않았던 ‘군주로서의 의지’를 담아낸 박지훈의 연기는 “단종이 실재했다면 저런 모습이었겠구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동감이 넘친다. 두 배우의 앙상블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서사에 인간적인 호흡을 불어넣으며 영화의 태생적 약점을 영리하게 커버한다.

● 극의 무게감을 흩뜨리는 ‘깔깔 유머’와 전형성에 갇힌 민초들

그러나 배우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연출 선택에는 뼈아픈 실책이 존재한다. 대중적인 호감도를 확보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배치된 장항준 감독 특유의 ‘깔깔 유머’ 구사 방식이 극의 깊이를 수시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특히 초반부 등장하는 광천골의 엄흥도와 옆동네 노루골 촌장(안재홍)이 펼치는 왁자지껄한 코믹 시퀀스는 극 전체의 톤 앤 매너를 불필요하게 희석한다.

‘단종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이 이미 역사로 예고된 상황에서, 오히려 영화가 조금 더 정공법으로 처연한 분위기를 밀어붙였다면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묵직한 작품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웃음을 주어야 한다는 연출자의 강박이 오히려 영화가 도달해야 할 비극적 숭고미를 가로막는 모양새다.

사진제공|쇼박스

사진제공|쇼박스

조연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 또한 아쉬운 대목이다. 광천골 주민들을 그저 ‘순박하지만 마음 따뜻한 시골 사람들’로 평면화시킨 연출은 영화를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것을 방해한다. 이들은 주인공들의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적 배경으로만 기능하며, 일차원적인 인물 묘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주변 인물들이 이토록 전형적인 틀에 갇히다 보니, 영화 전체의 공기 또한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머물며 작품의 예술적 밀도를 낮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시 말해, ‘왕과 사는 남자’는 두 주연 배우의 연기가 곧 개연성이 된 작품이다. 연출의 가벼움을 유해진의 깊이와 박지훈의 눈빛이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다. 117분의 러닝타임 동안 두 배우가 빚어내는 감정의 파고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장항준 감독의 코믹 연출법이 사극이라는 장르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짙은 잔상을 남긴다. 배우들의 열연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영화의 그릇이 다소 얕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승미 기자 s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