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에릭센이 17일(한국시간) 독일 슈투트가르트 아레나에서 벌어진 슬로베니아와 유로2024 조별리그 C조 1차전 전반 17분 선제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사진출처|에릭센 SNS
심장마비를 딛고 돌아온 덴마크 미드필더 크리스티안 에릭센(32·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2024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24)에서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이어갔다.
에릭센은 17일(한국시간) 독일 슈투트가르트 아레나에서 열린 슬로베니아와 유로2024 조별리그 C조 1차전에 선발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다. 전반 17분에는 요나스 빈의 패스를 받아 선제골을 터트렸다. 팀은 후반 32분 에릭 얀자에게 동점골을 내줘 1-1로 비겼지만, 에릭센의 활약만큼은 인상적이었다.
에릭센에게는 출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은 경기였다. 그는 2021년 6월 13일 벌어진 핀란드와 유로2020 조별리그 B조 1차전 전반 42분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료진의 응급조치 덕분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심장에 제세동기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슬로베니아전은 그가 심정지로 쓰러진 뒤 1100일 만에 다시 밟은 유로 무대다. 트라우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패스 성공률 87%, 활동량 11.7㎞를 기록하며 공·수에서 팀을 이끈 결과 유럽축구연맹(UEFA)으로부터 경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인간승리의 이면에는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유로2020 이후 에릭센은 ‘제세동기를 삽입한 선수는 이탈리아 세리에 A 경기에 뛸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2021년 말 인터 밀란(이탈리아)과 계약을 해지했다. 그대로 은퇴수순을 밟는 듯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현역 연장을 모색하던 그에게 브렌트퍼드(잉글랜드)가 손을 내밀었다. 과거 아약스(네덜란드), 토트넘(잉글랜드) 등 명문 구단들을 거친 그의 커리어에 비해 브렌트퍼드는 작은 구단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축구화를 신은 뒤 동화 같은 일들이 펼쳐졌다. 브렌트퍼드 소속으로 반 년간 11경기에서 1골·4어시스트를 올린 덕분에 2022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로 이적할 수 있었다. 에릭센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2시즌 동안 72경기를 뛰며 3골·13어시스트로 건재를 알렸다.
에릭센이 슬로베니아전을 1-1 무승부로 마친 뒤 UEFA로부터 경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사진출처|덴마크축구국가대표팀 공식 SNS
그 사이 대표팀에도 복귀했다. 2022년 3월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은 에릭센은 2022카타르월드컵 등 메이저대회에서 덴마크대표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이날 슬로베니아전까지 A매치 131경기에서 42골을 기록 중인 그는 덴마크 역대 출전 2위, 득점 4위의 ‘살아있는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슬로베니아전을 마친 뒤 에릭센은 “이번 유로대회에서 나의 이야기는 지난 번과 아주 다르다”며 “경기에 자신감이 있었고,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유로대회는 항상 특별하다”고 밝혔다. 이어 “유로대회에서 득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 마음은 오로지 축구뿐이었다. 단지 내 골로 팀을 도울 수 있어 행복했다”는 가슴 찡한 소감을 남겼다.
권재민 기자 jmart220@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