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40주년기념앨범발표…어느덧‘선생님’소리에격세지감
오드리 헵번은 아름다운 배우로 기억된다. 청순하고 매혹적인 외모보다 죽음을 무릅쓰고 참사랑을 실천한 마음씨로 더 존경받는다. 말년에 직장암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돌보며 마지막 생을 보냈다.
가수 정훈희는 사람들에게 오드리 헵번과 같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최근 40주년 기념앨범이자 30년 만에 발표한 독집 앨범을 오드리 헵번에 대한 오마주로 삼은 것도 그런 이유다. 재킷에는 한국 수채화의 대가 류은자 화백의 ‘오드리 헵번의 회상’ 시리즈에 정훈희의 얼굴이 대입돼 있다.
“곱게 늙어간 그 분은 내겐 운명이고 또 계시가 됐죠. 그 사람의 삶이 목표가 됩니다.”
1967년 ‘안개’로 데뷔했던 ‘여고생 가수’ 정훈희는 어느덧 ‘선생님’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됐다. 40년이란 세월은 정훈희의 얼굴에 잔잔한 주름을 만들었지만, 고운 목소리는 세월을 비켜갔다. 이번 앨범에서도 ‘인연’ ‘삐삐꼬로랄라’ ‘러브 이즈’ ‘노 러브’ 등을 사뿐히, 때로는 씩씩하게 부른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곱고 부드럽다.
# 데뷔 40년, “나를 안 거친 남자가수는 없었지”
- 4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떤지.
“40주년이라고 해서 뭐 특별할 건 없어요. 생일을 그냥 보내듯, 또 한 해를 맞은 것이죠. 이러다 또 10년 후엔 50주년을 해야죠? 하하.”
- 오랜만에 가요계로 돌아와 격세지감을 많이 느낄 것 같다.
“옛날엔 방송에서 어깨가 드러나거나 가슴골이 보여선 절대 안됐죠. 그때는 속옷검사도 했어요. 여자가 담배 피고 술 마시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당시에는 입술 뺏겼다고 결혼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난 빨리 ‘까진’ 가수였어요. 일찍부터 국제가요제 나가다 보니 빨리 깨우쳤지요.”
- 한창 때, 라이벌은 누구였는지.
“라이벌은 없었고, 2년 선배 문주란, 임희숙과 같이 활동했고 이수미, 방주연도 있었죠. 남자가수는 남진, 나훈아 조영남 등이 있었죠. 나는 그들 모두와 듀엣을 했어요.”
- ‘무인도’, ‘꽃밭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는 노래다.
“‘꽃밭에서’ ‘무인도’에 비해 ‘안개’는 좀 어려운 노래에요. ‘무인도’는 볼륨감 있는 사람들이 부르면 신나는 노래고, ‘꽃밭에서’는 부르긴 어렵지만 목소리가 고우면 부를 수 있어요. ‘안개’는 잘 불러야 본전이지요.”
# 30년만의 독집 앨범, “‘뒷방 할머니’ 취급 안 당해 좋았다”
- 78년 이후 독집음반은 30년 만이다.
“우리 때는 결혼해서 애 낳으면 은퇴하는 수준이었죠. 아이 낳고 살다보니, 미혼 시절과 달리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어요.”
- 이번 음반을 내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었나.
“더 늙기 전에 앨범을 내고 싶었는데, 마침 이영훈 씨가 제안을 해왔죠. 하지만 그가 발병(대장암)하고, 미뤄졌다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만 미완성으로 남게 됐죠. 새 작곡가들을 섭외해서 다시 작업하느라 5개월 쯤 늦어졌어요.”
- 템포가 있는 ‘삐삐꼬로랄라’가 타이틀곡인데.
“요즘 안 되는 일이 많아서 템포가 빠른 노래로 정했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응원가인 셈이죠. 인순이와 함께 부른 빠른 템포의 ‘노 러브’로도 같이 활동할 겁니다.”
- 45rpm, 버블시스터스 등 젊은 가수들과 함께 부른 곡들이 눈에 띤다.
“젊은 세대들도 같이 들을 수 있는 노래를 해서 너무 좋아요. 나랑 20년 차이 나는 후배들이 ‘뒷방 할머니’ 취급 않고 선배 대접을 해줬어요.”
- 이번 앨범이 후배들에게 어떤 자극이 되길 바라는가.
“패티김, 현미 언니가 50주년 앨범을 냈는데, 내가 그걸 보고 따라가듯이,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노래하게 하는 자극이 되고 싶어요.”
# 자연인 정훈희, “예쁘게 늙고 싶다”
- 여가수는 오래 활동하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남성우월주의도 한 몫을 하죠. 결혼 이후 활동을 중단한 여가수도 많았고요. 팬층도 바뀌었어요. 내가 활동하던 시절 관객은 대부분 남자였는데, 요즘은 여자들이 ‘오빠’라고 외치죠. 노래잘하는 가수들이 음반이 좀 안 팔리더라도 포기하지 말았으면 해요.”
- 남편과 아들 모두 노래하는 음악가족으로 유명하다.
“큰 아들이 이번에 코러스로 참여를 했어요. 아직은 초보자인데, 목소리는 조금 좋은 편이라 연습을 많이 하면 좋아질 것 같아요. 큰 아들은 발라드를 좋아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록 음악을 좋아해요.”
- 목소리나 외모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은.
“특별한 관리는 안 해요. 오드리 헵번은 얼굴에 손 안댄 배우죠. 아프리카에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참 예쁘더라고요. 나도 예쁘게 늙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드리 헵번처럼 죽을 때까지 예쁜 짓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정훈희는?
17세이던 1967년, 이봉조 작곡의 노래 ‘안개’로 데뷔. 당시 동명의 영화에 삽입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시 워낙 ‘안개’에 대한 요청이 뜨거워 급히 음반을 출시하느라 재킷사진도 찍지 못했다. 이후 ‘꽃밭에서’ ‘무인도’로 해외 가요제에서 수상하며 인기를 누렸다. 국제가요제에 자주 참가해 ‘국가대표 가수’로 인정받았다. 또한 다이아나 로스의 노래를 많이 불러 ‘한국의 다이아나 로스’로 불렸다.
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