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 벨기에] “하룻밤 포탄 3500발 비오듯… 매일 죽음의 공포”

입력 2010-05-2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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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참전용사들이 지난달 7일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에 모여 참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몽피에르 노통브, 마르셀 샤네,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알베르 드웨베, 마르셀 와트, 르네 베르 씨.

벨기에 참전용사들이 지난달 7일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에 모여 참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몽피에르 노통브, 마르셀 샤네,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알베르 드웨베, 마르셀 와트, 르네 베르 씨.

■ 참전용사의 잣골전투 회고

벨기에참전용사회 회장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1953년 강원 철원군 최전선에서 벌어진 잣골전투에서 보병중대를 이끌었다. 잣골전투는 중공군과 가장 치열하게 치른 전투 중 하나다.

“하룻밤에 35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소. 본국 귀대 하루 전 포탄에 맞아 전사한 중대원도 있었지. 중공군의 공격 징후를 알자마자 쏟아지는 포탄들이 정말 지긋지긋했어. 반격을 위해 포를 조준하면 이미 중공군은 사라지고 없었지.”

포탄 소리의 끔찍함에 대해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철로에 묶인 채 전력질주하는 기차 아래 누워 기차 소음을 밤새 듣는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정말 두려웠네. 매일 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 포탄에 파묻혀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와 싸워야 했지. 잠을 자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어.”

전장에 즐비한 시체들도 그를 괴롭혔다.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시체가 너무 많아 부대가 이동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시체를 길 양쪽으로 치워야 했지. 그 쌓여가는 시체들….” 그는 그 충격 때문에 전투식량으로 지급된 고기를 먹지 못할 정도였다.

브뤼셀지회 부회장인 르네 베르 씨는 1951년 4월 임진강에서 중공군 제188사단과 치른 전투를 떠올렸다. “전투를 치른 지 2개월 뒤 격전지에 돌아와 보니 민간인과 군인들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지. 그 와중에 군복과 전투화 등 ‘살아 있는 자’를 위해 쓸 만한 것들을 찾는 내가 비참해졌지. 그만큼 참혹했어.”

마르셀 샤네 씨는 1953년 4월 잣골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오전 2시경 포격에 막사가 무너지며 팔이 깔린 것이다. 눈앞에서 전우 3명이 전사했다. 그는 “비로소 내가 전쟁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았다.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제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참전했지만 최전선은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군인으로서 진정한 전쟁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참전용사회 부회장인 마르셀 와트 씨는 “2003년 한국에 갔을 때 한 택시운전사는 우리가 참전용사라는 말에 택시를 세운 뒤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참전을 잊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글·사진 브뤼셀·티엘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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