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바로티 이후의 파바로티’ 유럽 오페라 10년 주역, 테너 윤정수 [인터뷰]

입력 2022-09-05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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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그 중에서도 오페라 마니아라면 ‘윤정수(43)’라는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10년이 넘도록 게스트 가수로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주역으로 서고 있는, 현재 몇 안 되는 아시아인 테너 중 한 명이다.

윤정수를 두고 ‘제2의 파바로티’라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황금빛 음색이 파바로티를 완벽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음색이 비슷하다는 평가 자체가 그분께 송구한 일”이라는 윤정수의 말이 꼭 겸손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역시 그의 노래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감상한 느낌은 이런 것이다.

제2의 파바로티가 아닌, ‘파바로티 이후의 파바로티’.

해외에 머물며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공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윤정수와 수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서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콩쿠르 우승상금으로 생활비 충당하던 유학시절

- 최근 아일랜드에서 오페라 공연을 마치셨는데요. 이 작품이 세계 초연작이었죠.


“아일랜드 콜크 오페라 하우스(CORK OPERA HOUSE)에서 아일랜드 작곡가 존 오브라이언(JOHN O‘BRIEN)의 오페라 ‘모리간(MORRIGAN)’의 코너 맥네사(Conor McNessa) 역으로 공연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세계 초연이었고요. 아일랜드 전설에 모티브를 둔 작품이죠. 모리간이라는 여신의 다스림 아래에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일랜드 왕 역할이었습니다.”


- 아더 왕처럼 전설 속의 왕 역할이었군요.

“네. 처음에는 선군이었어요. 평화와 사랑으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악한 신하들과 주술사에게 영향을 받게 되죠. 자신이 원하는 젊은 소녀를 여왕으로 만들려다 거절당하자 질투의 감정이 점점 악한 감정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모든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악한 왕으로 변해가는 역할이었습니다.”

(※ 오페라 모리간의 작곡가 존 오브라이언은 작곡 단계에서부터 왕 역할로 윤정수를 염두에 두고 곡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 현재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한국인 성악가 중 한 분이십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클래식 공연계가 위축되어 있었는데, 요즘 유럽 분위기는 어떤가요.

“작년부터 극장들이 조금씩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예요. 재정상황이 탄탄한 큰 극장들은 이제 제대로 공연을 올리고 오페라를 돌리고 있지만 영세한 극장들은 팬데믹 기간동안 많은 타격을 받아 문을 닫은 곳도 많습니다. 많은 음악 매니지먼트와 성악가들이 그만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군요.

“아무래도 그랬죠. 특히 학업을 마치고 새롭게 이 분야에 발을 들이려 했던 젊은 음악가들이 시작도 못해보고 접는 걸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 여러 매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개인적 삶과 음악가로서의 활동 모두 기독교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저는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참석하며 노래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죠. 교회 성가대 활동을 통해 성악에 재미를 붙였고, 그 후 크리스천 합창 활동을 하면서 노래하는 것에 대해 신앙적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되었어요. 계속 성악가로서 나아가고자 하였기에 신앙적인 부분과 제 음악인생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일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달란트(재능)를 받으셨습니다.

“특별히 달란트를 받았다라고 하기보다는 기본적인 소리나 음악성이 성악을 해도 되는 학생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 하하, 너무 겸손하신 말씀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성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대학시절 합창 동아리 활동을 하며 해외에 연주를 다니고 기독교 동아리에서 군부대, 농어촌 노래 봉사활동을 다니는 동안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속 음악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고 꾸준히 정진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나아가다보니 한 단계씩 매년 발전하며 지금까지 계속해서 성악가로 살아올 수 있던 것 같습니다.”


- 노래하시는 모습을 영상으로나마 보고 있으면 듣는 이마저 참 평온한 느낌이 듭니다. 아티스트로서 이것은 대단한 강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고난과 스트레스를 겪을 수밖에 없을 텐데, 평소 이를 어떻게 극복하시는지요.

“저는 어릴 때부터 상당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왔는데 아무래도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것 같아요. 무언가 문제에 봉착하면 ‘어떤 방향이든 결과가 있겠지’ 생각하며 좀 우직하게 사는 성격이죠. 지나치게 걱정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해결될 때까지 계속 걸어 나가는 성격이라 고난이 닥칠 때마다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던 것 같습니다.”


- 영국 유학시절(윤정수는 연세대 성악과를 나와 영국 스코틀랜드 왕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이라든지 콩쿠르 관련 자료를 보면 경제적으로 썩 자유롭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콩쿠르 상금을 생활비로 사용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석사 2학년 때부터 한국에서의 경제적 지원이 끊겼거든요. 장학금 오디션을 봐서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하고, 학교에서 연결해 주는 음악회나 콩쿠르에 나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습니다. 학교 졸업 후엔 영국에 있는 음악인 지원 장학재단 등에 지원해서 장학금이나 생활비를 지원받았죠.”


- 요즘 말로 ‘짠내’ 물씬한 시절의 경험담이로군요. 이쯤 되면 ‘콩쿠르가 먹여 살려 키운 성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웃음).

“하하, 그런가요. 실제로 국제 콩쿠르에 많이 지원했습니다. 우승상금으로 프로 가수로 데뷔할 때까지 생활할 수 있었죠.”



●상한 마음을 위로하는 영양제 같은 노래


- 바리톤, 베이스에 비해 테너는 오페라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많죠. 실제로 다수의 작품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악가, 배우들은 무대에 서기 전 캐릭터를 철저하게 분석하는데요. 캐릭터를 연구하실 때 특별한 방법 같은 것이 있을까요.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캐릭터를 들여다볼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세계 초연한 모리간의 코너 맥네사 역할이 적절한 예가 되겠네요. 앞서 말씀 드렸듯 선군이었다가 악한 왕으로 변해가며 타락하는 캐릭터였는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울왕의 스토리에 대입시켜 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죠.”


- 확실히 다른 성악가들과는 ‘다른 시선’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대부분의 오페라 작품들이 사랑, 배신, 질투, 복수 등을 다루고 있죠.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스토리 또한 이런 감정들을 내포한 경우가 많거든요.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관객의 박수를 받을 때야말로 예술가들이 가장 보람있고 행복한 순간일 것 같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저는 그 시간에 항상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과 가족에 대한 사랑, 고마움을 상기합니다. 아무래도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보면 자신에 대한 자랑과 영광으로 가득 찬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그 후에 남는 것은 허무함 뿐이라는 것을 감사하게도 오래 전에 깨닫게 되었거든요. 그 이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 나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가족들이다’라 생각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 오페라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대표적인 종합예술입니다. 그런 만큼 화합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일을 하다보면 동료 가수, 스태프, 지휘자 등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시니 아시아인들이 겪기 쉬운 인종차별의 문제도 ….

“사실 이제 인종차별을 느끼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로 활동하는 영국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오페라 무대에서 관계자들과 일하는 과정에서 인종차별을 느끼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 그건 다행이로군요. 동료들과는 어떨까요.

“동료들과 마음이 맞지 않게 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다들 프로니까요. 자기가 할 일을 집중해서 하는 사람들이죠.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매너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아주 없지는 않을 텐데요.

“물론 아주 가끔 극도로 예민하고 불친절하거나, (성격 등이) 맞지 않은 사람들과 만날 때도 있지요. 그런데 제가 좀 … (웃음)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고 해도 그냥 둥글게, 일을 더 크게 만들지 않는 성격이라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 요즘은 정통 성악가들도 대중 음악가들과 활발하게 협업을 하기도 하고 대중적인 장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프라노 임선혜씨는 국내에서 뮤지컬 ‘팬텀’의 여주인공 크리스틴으로 출연하기도 했죠. 혹시 클래식이 아닌 장르에서도 활동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저는 26년간 성악가의 길만 걸어왔기에 앞으로도 성악가로서 노래하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게 되겠지만 발성이나 음악적 방향성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다면 뮤지컬이나 다른 장르의 음악도 충분히 협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인생의 비전, 목표가 있다면.

“크리스천 음악가로서의 목표라면 예수가 가르쳐준 사랑과 용서, 또 긍휼한 마음으로 단순히 좋은 소리나 음악성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또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영양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며 또 그런 목표를 갖고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과 한국의 독자들 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럽에서 15년간 쉬지 않고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며 무대에서 배우고 느낀 많은 것들을 이제 한국에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관객 분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저를 갈고 닦겠습니다. 앞으로 유럽 무대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좋은 성악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도전하며 관객 분들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이 되는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테너 윤정수 프로필

1979년 서울 태생

연세 대학교 성악과

스코틀랜드 왕립 음악원 오페라과 석사 전액장학생 및 최우수 졸업

스페인 몽세라 카바예 국제콩쿠르 1위
런던 리하르트 타우버 콩쿠르 1위
웨일즈 스튜어트 버로우즈 국제 성악 콩쿠르 1위
프랑스 Les Azurial opera 콩쿠르 1위

한국인 최초 영국 문화청으로부터 우수인재 비자 획득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웨일즈국립 오페라, 덴마크 국립오페라, 스웨덴 국립 예테보리 오페라, 스코티쉬 오페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오페라, 벨기 에 리에제 오페라 등 유럽 유수의 오페라단에서 10여 년간 주역테너로 활동

현재 서울 추계예술대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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