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계획하지만 인간은 선택한다” 이지훈·선예·김현숙의 뮤지컬 ‘루쓰’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9]

입력 2023-03-12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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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룻기’를 뮤지컬로…광림아트센터 BBCH홀
-이지훈, 연기 노래 모두 퍼펙트…‘좋은 배우’의 표본
-선예, 뮤지컬 데뷔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되길”
-김현숙, 나오미 열연…다른 배우들도 ‘확’ 살아나
뮤지컬 루쓰.
‘혹시 룻?’ 하신 분이시라면, 네! 맞습니다. 그 룻입니다.
성서의 구약 ‘룻기’의 주인공, 룻입니다. 룻기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된, 구약성경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착한(짧습니다!)’ 책이지요.

이 뮤지컬 작품에서는 성경 속의 ‘룻’ 대신 ‘루쓰(Ruth)’로 표기했습니다.
간혹 ‘룻’을 ‘롯’과 혼동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롯은 룻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사람이고, 심지어 남자죠.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과 불의 비로 멸망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두 딸과 함께)입니다. 롯의 아내는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죠.

목숨을 구한 롯은 또 한 번 ‘큰 일’을 겪습니다. 롯의 두 딸이 후손을 잇겠다는 명목으로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는 동침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두 딸은 아들을 낳게 되는데 큰 딸이 낳은 아들 이름이 모압, 둘째 딸의 아들 이름은 암몬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 두 아들의 후손은 ‘모압인’과 ‘암몬인’이 되는데 두고두고 유대인들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하면, 바로 이 뮤지컬의 주인공인 루쓰가 모압인이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극혐하고 적대시하는 인종이란 얘기.
유대인이자 베들레헴(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죠)의 인기남인 보아스와 모압여인 루쓰의 사랑 앞에는 이처럼 초장부터 거대한 난관이 놓이게 되는 겁니다.

뮤지컬 루쓰는 성경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균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였습니다. 노골적인 성극 스타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물을 애써 쥐어 짜 빼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이야기이니, 감안하고 보세요”라는 정도.

음악이 싱그럽습니다. 프로그램 북을 보니 윤현진 프로듀서가 극작과 작곡, 작사, 음악감독 까사(Casa)가 작곡, 편곡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네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34곡이나 되는 넘버에 잘 어울리게 입혔습니다. 메탈에 EDM의 느낌까지 살아 있으니 꽤 신선하지요?
넘버들은 듣기와 달리 부르기에는 은근 난이도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본 날의 루쓰는 선예 배우.
원더걸스의 리더였던 그는 이 작품이 뮤지컬 데뷔작이라고 하더군요. 열심히 연습한 흔적이 보입니다. ‘루쓰’라는 캐릭터에서 ‘선예다운 것’을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또한 연출과 배우의 의도가 아닌가 싶은데요.


데뷔작임을 감안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연기와 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선예 배우가 뮤지컬 무대의 매력을 충분히 즐겼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에서 다시 만나게 되길 기대합니다.

보아스는 이지훈 배우.
베들레헴의 꽃남이자 귀여운 나르시스트인 보아스에 이지훈 배우는 참 잘 어울려 보입니다. 베들레헴의 ‘원조 스타’는 예수님에 앞서 보아스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이지훈 배우는 ‘이국의 여인’과 결혼해 잘 살고 있으니 보아스 속에 쏙 들어갔다 나온 수준으로 캐릭터를 이해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최고의 기량을 지닌 배우인 만큼 전 넘버에서 안정된 노래를 들려줍니다. 연기, 노래 모두 퍼펙트. ‘좋은 배우’란 이런 배우겠지요.

아참, 보아스는 이지훈 배우와 함께 김다현 배우가 맡고 있습니다. 김다현 배우는 이 작품의 공동연출이기도 합니다.

오리지널 ‘룻기’도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도 나오미는 ‘사실상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극의 중심에서 스토리의 진행을 조정하는 그라운드의 감독 같습니다.
사실 김현숙 배우는 이런 역할에 능숙한 배우입니다. 기존 작품들에서도 종종 입증해 보였지요.

직접 골을 잘 넣기도 하지만 적시, 적소에 맞춰 공격수 발 앞에 볼을 딱 갖다 놓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이런 배우가 있으면 다른 배우들이 ‘확’ 살아나는 게 눈에 보입니다.
뮤지컬 무대가 처음인 선예 배우가 긴장감을 덜고 자신의 역량을 편히 내보일 수 있었던 데에도 틀림없이 김현숙 나오미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오미의 넘버들도 꽤 어려워 보였는데 역시 잘 소화해 내더군요.

이 작품의 테마곡이라고 할 만한 ‘사랑은 아름다워’는 제목만큼이나 아름다운 보아스와 루쓰의 듀엣곡. 보아스와 앙상블의 역동적인 안무와 묵직한 기타의 리프, 랩이 심장을 뛰게 하는 ‘역사는 돌고 돌아’도 추천 넘버입니다.

해설자 미가엘 천사 역을 맡은 백승렬 배우는 처음 보았는데 노래가 정말 시원시원했습니다. 목구멍에서 위장까지 큼직한 파이프를 통으로 심어 놓은 듯한 소리. 후련했습니다. 미가엘은 “신의 뜻, 인간의 선택”이라는 꽤 묵직한 주제를 관객에게 반복해서 안깁니다.

뮤지컬 루쓰에는 오리지널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미가엘 천사도 그렇지만 ‘안티테제’로 설정한 아비람과 브닌나입니다.
아비람은 보아스의 사촌인데 보아스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시종일관 보아스에게 딴지를 거는 캐릭터지만 어쩐지 밉지만은 않습니다.
브닌나는 엘리장로의 딸로 보아스에게 마음을 두지만 여의치 않자 적으로 돌아섭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하는 전형적인 악녀 캐릭터지만 역시 밉지만은 않습니다.


두 인물의 책략이 썩 ‘고급지지’ 않은 데다 어쩐지 개그캐 같은 느낌마저 주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 덕분에 관객은 많이 웃을 수 있습니다. 아비람은 박인배 배우, 브닌나는 정단영 배우가 열연했습니다.

‘아비람’은 성경에 실제로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모세 시대에 반란을 꾀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땅 속에 빠져 죽는 인물이죠. ‘루쓰’의 아비람은 아마도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을 겁니다.
‘브닌나’도 성경 속 실존인물. 사사시대 사람으로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두 아내 중 한 명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나를 비웃으며 조롱합니다. 한나는 훗날 대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가 됩니다.

초연작임에도 뮤지컬 ‘루쓰’는 꽤 잘 만든 작품입니다. 성경의 짧은 에피소드에 예술적 상상력을 크게 덧입혀 흥미롭고 아름다운 스토리를 완성했습니다.

성경의 계보에 따르면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오벳. 오벳은 이새를 낳았는데, 이새는 저 유명한 다윗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보아스와 룻은 다윗왕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왕은 예수님의 조상이지요.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룻기’가 구약성서에 포함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겁니다.

사족 하나.
뮤지컬 ‘루쓰’에도 등장하지만 나오미에게는 루쓰말고도 며느리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역시 모압사람이지요. 이름은 오르바. 오르바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모압에 남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다윗과 거인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는 알고 있을 겁니다. 다윗이 던진 돌에 이마빡을 얻어맞고 즉사한 거인 골리앗.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 골리앗은 모압에 남았던 오르바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나오미의 증손 세대간의 싸움이라는 얘기. 요건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힘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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