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전자랜드배 현무왕전 결승에서 조훈현 9단을 이기고 우승하셨죠? 모처럼 라이벌을 꺾은 기분이 어떻던가요?
“라이벌은 무슨 … 그 사람이 싫어할 텐데. 그 사람에게 있어 나는 ‘샌드백’이죠. 샌드백한테 무슨 라이벌. 그 사람은 늘 1등이고 난 2등이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슬그머니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두 사람이 마주하면 바둑판 위에 빙설이 쌓이는 듯 냉랭한 기류가 흐른다. 30년이 지난 지금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두 사람 간 상대전적은 조훈현이 243승 118패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객관적인 성적만 놓고 본다면 서9단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훈현의 전성기 시절, 서봉수는 한국바둑계의 유일한 대항마였다. 제왕의 전횡에 맞서 유일하게 칼을 뽑아 들었던, 야성의 무사였다.
-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서9단께서 조9단에게 6승 5패로 앞섭니다. 팬들은 지금 만약 두 분이 도전5번기를 벌인다면 어떨까 궁금해 하는데요.
“지금은 … 비슷할 거예요. 정식으로 승부 들어가면. 난 그렇게 생각해요. 단둘이 두게 된다면, 지금이라면 질 생각은 없죠.”
- 두 분은 예전부터 대국 후 복기를 안 하기로 유명하셨죠?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내가 안한 게 아니고, 조훈현이란 사람이 안한 거죠. 그 사람은 강자죠. 강자가 (복기를)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그 사람이 택하는 거죠. 하수야 그냥 바라보고 있는 거지. 상대가 자기 적인데, 적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알려줄 수 있겠어요? 칼로 자기 목을 겨누는 건데, 그걸 가르쳐달라고 할 수 없죠. 하자고 말도 못했어요. 나는 늘 내가 하자고 하는 게 없어요.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는 거지. 복기도 상대가 원치 않으니까 하잔 소리를 안 한 것뿐입니다.”
서9단이 시계를 보더니 ‘아이들과 바둑 둘 시간’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 마디 한다.
“나는 언제라도 조훈현 9단이 손을 내밀면 마주잡을 마음이 있어요.”
인터뷰가 있던 며칠 뒤, 서봉수 9단이 감독을 맡고 있는 한국바둑리그 티브로드팀이 지난해 우승팀 영남일보에게 2연패 뒤 3연승을 거뒀다. 한 인터넷바둑사이트에는 서9단의 환한 얼굴과 함께 ‘기적이 일어났어요’라는 서9단의 말이 부제로 달려 있었다.
한국바둑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거론되어야 할 불멸의 이름 서봉수. 그는 과거를 잊었으나 팬들은 그의 과거를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기억상실이란 것도 결국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더욱 강해지기 위한,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의도적 작업이 아니었을까. 바탕화면 앞에 앉아 휴지통 속의 기억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최후의 ‘Delete’ 키를 만지작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야인의 말말말…
서봉수 9단은 젊은 시절 ‘반상의 철학자’로 불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지성, 혜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물의 본질을 단숨에 꿰뚫는 촌철살인의 통렬함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대부분 자신이 했던 말들에 대해 “내가 그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했다. 그는 잊었을지 몰라도, 팬들 기억 속의 ‘서봉수표 어록’들은 영원히 남아 그를 추억하게 만들 것이다.
“조훈현은 나의 스승이었다.”
“바둑이란 나무 위에 돌을 놓는 것일 뿐이다.”
“일류와 삼류의 차이를 나는 모른다. 아니, 전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존경이란 강아지가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바치는 감사표시이다.”
“프로가 주어진 시간을 다 활용하지 않고 패배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바둑의 핵에 가장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면 아마도 이창호일 것이다”
“속기는 프로를 광대로 만든다.”
“인생 40 이후는 리바이벌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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